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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천 원의 행복

2021. 6. 22. 화요일
 

여느 날처럼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치곤 집을 나섰다.
꽤 오래되어 습관처럼 되었지만 작년 2월 어느 날부터 달라진 것도 적지 않은 일상이다.
은규를 태운 유치원 승합차가 아파트 귀퉁이를 돌아갈 때까지 손을 흔들다 들어와서 아침을 먹었던 것은 은규가 매헌초등학교 교문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꼭 껴안으면서 "이따 2시 30분에 만나자." 하곤 손을 흔들다 집에 돌아와 식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일 년 반쯤 전에는 아침 식사 후 집사람이랑 커피 한 잔 후 두툼한 스포츠 가방을 둘러메고 집을 나섰는데 지금은 큼직한 스포츠 가방 대신 핸드폰과 생수 한 병을 꽂은 허리쌕만이 내 허러에 둘러져 있을 뿐이다.
아! 아니다. 그러고 보니 새로 생긴 버릇이 하나 더 있다.
쌕을 허리에 차기 전에 지갑에서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꼬깃꼬깃 접어 쌕에 넣는다.
천 원짜리 한 장이 담긴 쌕의 속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내 걸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다.
 
아파트 밖은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중죄인이 된 듯한 세상이다.
십 년이 넘도록 언남스포츠센터를 향하던 내 발길은 양재천으로 바뀐다.
언남스포츠센터의 러닝머신은 양재천 산책로와 양재 시민의 숲 숲길로 변해있다.
러닝머신을 타듯 양재천 변 산책로와 시민의 숲 숲길을 달리거나 앞으로 걷고 뒤로 걷는다.
'개콘', '강적들', '나는 자연인이다.'처럼 재미나면서 흥미진진한 장면으로 내 혼을 빼앗곤 하던 러닝머신의 TV는 없지만 이보다 더 좋은 벚꽃, 개나리, 유채꽃 등 갖가지의 꽃들이 피고 지더니 지금은 빨간 양귀비와 하얀 메밀꽃이 한창일뿐 아니라 양재천 변 사방팔방으로 널린 하얀 토끼풀 꽃과 팔뚝보다 더 큰 잉어들이 떼를 지어 다니면서 자연인이 된 나를 반긴다. 
어느새 1시간 30분, 7∽8km를 달리거나 걸어 도착하는 시민의 숲 맨발공원.
온갖 운동기구들은 물론 덤벨과 바벨 중량별로 비치된 헬스장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우리 아파트 앞 근린공원에 비해서는 역기 중량이 훨씬 다양한 데다 봄이면 주변의 꽃이 좋고 가을이면 단풍이 좋지만 지금 같은 여름은 더 좋다. 나무 그늘이 좋아 에어컨 바람보다 더 시원한 자연풍 산들바람이 자주 불어 햇볕 따가운 한낮에도 중량 운동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곳이다. 게다가 일부러 이곳까지 찾아와 운동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 기껏해야 동네 사람 두세 명 또는 점심시간을 활용해 운동하는 직장인 서너 명밖에 안 되니 내가 운동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비가 오는 날이나 특별한 약속이 있어 빠지는 날을 제외하고는 평일엔 날마다 이곳에서 1시간 30분 정도 헬스장에서 했던 것처럼 중량별 역기로 하루는 어깨, 다음 날은 이두근과 삼두근 그리고 그다음 날은 가슴 등, 이렇게 근력운동을 하고 있으니 내 개인 헬스장이나 진배없을 뿐 아니라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괜찮으니 더 좋다. 십 년 가까이 다니던 서초구립 언남체육센터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작년 2월부터 문을 닫는 바람에 고육지책으로 시작한 양재천과 시민의 숲에서의 운동이 얼마나 좋은지 그리고 얼마나 정이 들었는지 모른다. 지난 4월부터는 언남체육센터가 수영과 GX 등을 제외하곤 다시 문을 열었다며 헬스장에서 운동하러 오라는 연락이 왔었지만 얼마간은 더 양재천과 시민의 숲에서 운동하고 싶어 언남체육센터의 등록을 미루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오후 1시가 가까워지면 슬슬 배꼽시계가 신호를 보낸다.
세 시간 동안 물만 마시면서 뛰고 걷고 무거운 역기까지 들고 있으니 배가 고프단다.
배꼽시계의 신호도 신호지만 2시 또는 2시 30분까지 은규를 데리러 가야 하는 데다 그전에 꼭 해야 하는 게 하나 더 남았기에 운동을 서둘러 마무리한 다음 풀어놓았던 쌕을 허리에 다시 두른 채 마스크를 쓰고 시민의 숲을 떠난다.
시민의 숲을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 AT센터 쪽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점점 가벼워지면서 빨라진다.
 
멀리서 보이는 AT센터 앞 노점상 부스
멀리서도 잘 보이는 노점상 부스의 현수막을 차지한 '오뎅'이란 글자에 벌써 입 안에는 침이 고이고···
평일이면 거의 날마다 이 시간에 만나는 노점상 아저씨는 나를 보자마자 종이컵에 오뎅 한 개를 담은 후 국물을 붓고···
나는 꼬치에 꽂힌 오뎅에 분무기로 간장을 칙∽ 뿌린 후 입에 넣은 다음 꼬깃꼬깃 구겨진 천 원짜리를 펴서 돈통에 넣는다.
역시 오뎅은 오늘도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조금은 뜨거워서 후후 불면서 마시는 오뎅 국물도 역시 꿀맛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오뎅'이란 글자는 보기만 봐도 입맛이 다셔지는데 '어묵'이란 글씨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왜일까? 
30년도 넘었을 만큼 오랜 전에 먹었던 게 어묵이 아니고 오뎅이고, 아직도 그 맛을 잊지 못해서일지 모르겠다.
내가 한알은행 포항지점 책임자로 근무하던 때였으니 아마 1986년과 1987년도의 겨울이겠다.
서울에서 살던 우리 가족은 내가 포항지점으로 승진 발령을 받음에 따라 나를 따라 포항으로 이사해 살면서 한 달에 한두 번씩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을 찾아뵙곤 했었다. 포항에서 내 고향 경북 청도까지의 거리는 이백 리로 약 80km밖에 안되지만 내게 차가 없었던 당시로서는 시외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야 했으니 꽤 번거로운 걸음이었지만 자주 간 편이다.
특히 추위가 매서웠던 겨울의 걸음은 더 힘들었다. 집사람과 함께 예닐곱 살짜리 쌍둥이 두 딸을 데리고 포항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경주 가는 버스를 탄 다음 경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구 가는 시외버스로 타서는 청도 동곡의 정류소에서 내려 한참을 기다리다가 대구 남부정류장에서 출발해 유천으로 가는 시골 버스가 동곡 정류장에 들리면 타야 했다. 하지만 동곡은 내 고향 마을에서 8km, 이십 리밖에 안 되는 곳이라 이곳 정류장에 도착하면 고향에 다 왔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늘 시장기가 느껴지곤 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3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겨울 주말 집사람과 함께 두 딸을 데리고 고향에 가다 먹었던 동곡 버스정류장의 오뎅 맛을 기억한다.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두 딸과 집사람이 얼마나 맛나게 먹던지···, 가느다란 대나무 꼬챙이에 꽂힌 소시지처럼 생긴 오뎅이 얼마나 맛나던지···, 찬바람이 쌩쌩 부는 날 후후 불면서 마시는 따끈따끈한 오뎅 국물은 또 얼마나 시원하던지···, 고향 집 대문을 열면서 "엄마" 하고 부르면 맨발로 달려 나와 반겨주시던 엄마의 품의 얼마나 따뜻하던지···
지금도 나는 오뎅을 먹을 때는 그때 오뎅 먹었던 기분으로 오뎅을 먹지만 일부러 딱 한 개만 먹는다.
혹시 한 개라도 더 먹으면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에 따라 맛이 덜해질까 봐 더 먹고 싶은 욕심을 누르는 것이다.
그때의 맛과 그때의 행복을 잊지 못해 매일같이 1,0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꼬깃꼬깃 접고 있으니 천 원의 행복인 셈이다.
'천 원의 행복'
행복이 돈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아 다행이다.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1,000원짜리 한 장으로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는 세상인데 그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으로 잠시나마 행복을 느낄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그러면서 날마다 '천 원의 행복'을 만끽하는 소박한 내 삶이 다행이고 고맙다.
날마다 천 원짜리 한 장을 허리 쌕에 넣어 집 나서는 내 진짜 속셈은 어쩜 운동이 아니라 운동 후의 오뎅일지 모른다.
노점이 문을 열지 않는 주말에만 청계산에 오르는 내게 산행은 핑계이고 속내는 이수봉에서 파는 오뎅일지 모른다.
오뎅이 주는 천 원의 행복, 오래오래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
임도 보고 뽕도 따는 행복, 꿩 먹고 알 먹는 행복. 
소소한 행복이 많은 삶이 되도록 애써야겠다 
 

하얀 메밀꽃이 활짝 핀 양재천 메밀밭
아름다운 수례국화 꽃밭으로 변한 양제천 흙길
양재천 갈대숲 길
밀미리 보행교에서 바라본 동쪽의 양재천 풍경
밀미리 보행교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양재천
양재천에서 징검다리 건너는 연습을 하는 유치원 어린이와 선생님들
벚나무들이 즐비해 봄이면 벚꽃 터널로 변하는 양재천 뚝방길
먹이를 기다리는 양재천 잉어들
양재 시민의 숲
양재시민의 숲 윤봉길의사 동상
울창한 단풍나무가 터널을 만드는 시민의 숲 단풍길
평일에는 호젓하기 그지없는 시민의 숲 잣나무 오솔길
청설모의 놀이터이기도 하지만 걷기에 더 없이 좋은 잣나무 흙길
봄에는 봄꽃, 여름에는 여름꽃, 가을에는 가을꽃, 겨울에는 눈꽃                                         계절마다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 입는 시민의 숲 원두막 정원
시민의 숲 맨발공원
맨발공원 안에 마련된 운동기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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