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2. 목요일
시끌벅적하던 차 안이 마침내 조용해졌다.
은규가 침묵 게임을 제안한 덕이다. 운전하는 나는 심판이 되고 집사람을 비롯해 세은이와 은규, 원준이가 침묵 게임에 들어갔다. 말을 하면 나머지 세 사람으로부터 꿀밤 한 대씩이란다. 승용차는 분당↔내곡간 도시화도로를 벗어나 여수대로에 접어들었다. 10분을 훨씬 넘었는데도 말 한 마디가 들리지 않기에 내가 외쳤다.
"5분간 휴식"
차 안은 언제 조용했냐는 듯이 다시 왁자지껄해졌다.
그러면 다시 "침묵 게임 시작", 다시 "5분간 휴식", 침묵 게임과 5분간 휴식이 몇 차례 반복되고…
집사람이 외손주들로부터 꿀밤 한 대씩을 맞고 있을 때 우리 승용차는 동곤지암톨게이트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원준이가 교육방송을 듣느라 12시쯤 출발했으니 오후 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며칠 전 경기도 광주사돈께서 내게 전화를 하셨다.
한 달에 한두 번쯤은 손주들을 볼겸 우리 동네로 오시기에 가끔 식사를 함께 하는데, 놀러 오라는 전화였다.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범국민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언급하시곤 우리 부부가 꼼짝 못하고 외손주들을 돌보느라 고생이 많다면서 평일에 아이들을 몽땅 데리고 산으로 오란다. 산속의 농장에서 맑은 공기로 답답함을 풀면서 고기도 구워 먹자면서 중곡동 사돈부부도 참석하면 좋겠다며 연락을 부탁하셨다.
잘 됐다 싶었다.
해마다 이맘 때쯤을 포함해 일 년에 한두 번씩은 원준이와 세은이의 친조부모이신 광주 사돈부부, 은규의 친조부모이신 중곡동 사돈부부 그리고 요 세 놈들의 외조부모인 우리 부부가 함께 남한산성, 청계산 등 근교의 산에 올랐다가 하산해서는 식사를 하거나 아니면 남도여행을 다녀오곤 했었다. 게다가 지난 연말모임에서 2020년 올해에는 은규네가 지중해 크루즈여행을 떠나는 5월 초에 맞추어 울릉도여행을 한번 추진하겠노라 운을 띄워놓았었다. 그런데 우한폐렴이란 몹쓸 역병이 온 세계를 덮치는 바람에 은규네가 예약했던 5월 해외여행이 전면 취소 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 국내에서도 각 지방자치단체는 모여드는 상춘객들 중에 혹시라도 감염확진자가 있을까 봐 모든 행사를 취소한 데다 지방민들은 낯선 사람들이 찾아오는 자체를 두려워하는 탓에 모든 국내여행마저 올스톱 된 상황.
울릉도여행 대신 사랑하는 손주들과 반나절 보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곤지암TG에서 수백 미터밖에 안 떨어진 농장.
삼겹살을 맛나게 굽고 계셨던 광주사돈께서 우리를 반겼다.
들어서자마자 아이들은 밥은 찾지도 않고 고기로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얼마나 맛있게 잘 먹는지…, 고기를 굽는 광주사돈은 막걸리 한 잔 마실 틈조차 아끼고 있었다.
농장에서 직접 재배해 더없이 싱싱한 명이나물, 머위 등에 삼겹살을 싸서 먹는 점심은 봄을 먹는 맛과 향이었다.
잠시 뒤 중곡동 사돈부부가 도착했다. 오는 길에 이천에서 인삼농사를 크게 짓는 조카를 만나 얻어 왔다면서 꽤 많은 미삼(尾蔘)이라 불리는 아기 인삼과 인삼씨앗을 내놓았다. 그러고는 반찬으로 무쳐 먹으면 인삼맛이 확 나는 게 몸에 아주 좋다면서 우리에겐 반찬용으로, 광주사돈께는 반찬으로 무쳐도 드시고 농장에 심어 6년근으로도 키워 보라며 미삼을 몽땅 두 몫으로 나누었다. 또 술로 담그면 뿌리로 담근 인삼주보다 더 좋다며 인삼씨앗도 큼직한 종이컵으로 한 컵씩 나누어 주셨다. 어른들끼리 차를 마시며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사돈이란 관계는 공통된 이야깃거리가 많아 좋았다.
손주 이야기, 자식 이야기…
바깥에서 노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40일 이상을 어린이집에 못 가고 있는 세은이.
초등학교 입학은 물론 유치원 졸업식까지 연기되고 있는 은규.
4학년 5반, 반 배정까지 받았지만 5반 교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원준.
코로나19 때문에 근 두 달 가까이 동안 바깥출입을 최대한 줄인 채 아래위층만을 오르내리면서 공부를 하거나 놀이를 하느라 엄청 답답했을 외손주들이 자연에 빠져 있었다. 흙먼지가 풀풀 일고 온 몸이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지만 삽으로 땅을 파고 뒹구는 모습은 티 하나 없이 밝은 장난꾸러기였다. 광주사돈께서 공사로 생기 흙언덕에 기다란 밧줄을 매달자 요놈들은 더 신이 났다. 열한 살인 원준이야 그렇다쳐도 이제 여섯 살이 된 세은이도 밧줄을 타고 아무런 도움 없이 급경사를 아주 잘 올랐다. 원준이 오빠와 함께 아빠를 따라 자주 오는 할아버지 농장이라 그런지 모든 게 익숙해 보였다. 역시 은규는 서툴렀다. 겁이 많은 데다 처음 해보는 밧줄타기라 한참 오르다가는 도움을 요청했다. 그렇지만 친할아버지이신 중곡동사돈께서 쏜살같이 올라가 좀 도와주면 곧잘 올랐다. 몇 번 도움 받았던 은규가 도움 없이 혼자서도 잘 오르게 되자 요놈들은 더 신이 난 듯. 언덕 오르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헤어져야 할 시간
광주사돈께서 자주 오란다.
아이들이 답답해하면 언제든지 데리고 오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침묵게임이 필요 없었다.
흙장난과 밧줄을 잡고 언덕을 오르내리느라 지쳤는지 조용했다.
코로나19 덕분인지 막힘없이 달리자 경기도 광주와 우리 동네 양재동은 마치 이웃 같았다.
우리 집 대문을 들어서면서 오늘 내 행복의 하이라이트가 시작되었다.
현관에서 흙투성이가 된 세 놈의 옷을 벗긴 후 화장실로 들여보내자 화장실이 떠나가듯 시끄워지고…
속옷만 대출 걸친 채 들어서자 내게 물세례가 쏟아졌지만 세은이, 은규, 원준이 차례로 머리를 감기고 몸을 씻어 주면서 행복을 만끽했다. 양털보다 부드러운 머리결과 비단보다 더 보드라운 살결의 세은이를 깨끗히 씻긴 후 내보내면 닦이고 새옷으로 갈아 입히는 절차는 집사람 몫. 언남스포츠센터가 우한폐렴의 확산 방지책으로 휴관하기 전까지는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이렇게 일주일에 두 번씩 원준이와 은규가 수영을 마치면 기다리던 내가 함께 샤워하면서 비눗칠을 해주곤 했었지만 근 두 달만에 요놈들을 샤워타올로 비눗칠을 하자 즐거움이 배가되었다. 은규에겐 큰 변화가 보이지 않았지만 원준이의 어깨와 등판은 어린이 태를 벗은 듯 골격과 근육이 제대로 자리를 잡은 게 11살 청소년답게 제법 우람하게 보였다. 다 씻긴 원준이와 은규를 내보내면 닦이고 새옷 등 나머지 절차는 또 집사람의 몫. 10년이 넘는 돌봄의 세월 덕일까? 집사람과 나의 이런 분업도 어느새 톱니바퀴 돌아가듯 척척.
외손주들이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사랑을 듬뿍 받는 모습도 내겐 행복이었다.
봄볕처럼 따사로운 행복이었다.
농장 입구
사돈께서 몸소 저 포크레인과 트럭으로 틈틈이 산을 평지로 만드신다니…
광주시내 아파트에 거주하시는 사돈께 별장(?) 겸 농막인 하우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사돈께서는 손수 지으신 황토방에서 삼겹살을 열심히 굽고 계셨다.
정원준, 송은규, 정세은이 삼겹살을 얼마나 잘 먹던지
고기 접시는 들락거리느라 정신이 없었을 듯…
농장에서 손주 재배한 야채
농장 한 켠에 자라고 있는 명이나물
얼마 후 옮겨 심어질 취나물 등 산나물의 새싹이 자라는 모종포트
삽 등으로 흙장난을 치는 아이들
6월쯤이면 까만 오디가 다닥다닥 달린 뽕나무가 빽빽했던 산이었는데…
윗 부분에는 아직도 뽕나무가 많았다.
이 곳이 주택지로 변하면…
밧줄을 타고 언덕 오르는 재미에 빠진 아이들
할아버지 농장이라 이곳에 자주 오는 정원준
요게 앵두꽃?
앵두꽃에는 무슨 냄새가 나는지 궁금한 정세은
친할아버지에 안겨 기분이 좋은 은규
한창 정담을 나누시는 광주 사돈부부, 중곡동 사돈부부 그리고 집사람
광주사돈의 친손자 원준, 세은 그리고 중곡동사돈의 친손자 은규
친할머니 사랑 외할머 사랑 독차지한 송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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