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추가
(2024. 7. 28. 일요일)
“시원해?”
“네, 너무너무 좋아요”
“우리 세은이 몇 살까지 이 할비가 발마사지 해 줄까?”
“음...”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하면 될까?”
“아니, 더 오래”
“그럼, 고등학생 될 때까지?”
“아니 더 오래...”
“그럼, 세은이 대학생 될 때까지 해 줄게. 세은이가 지금 초등 3학년이니까, 4,5,6 또 중학교 1,2,3 고등학교 1,2,3 올해 빼고도 9년이네. 할아버지는 지금 일흔한 살이라 세은이가 대학생 될 때면 팔십 살인데 그때도 세은이 발마사지 해 줄 힘이 있을까 모르겠다.”
“백세시대인 거 몰라 할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는 운동 많이 하잖아. 지금처럼 매일 운동하시면 백 살까지도 할 수 있어.”
지금은 중학교 2학년인 원준이가 초등 3학년이 될 무렵부터 내가 돌봐주기 시작한 초등 수학공부를 은규와 세은이가 이어받아 매일 저녁이면 내 책상을 차지한 지 서너 해가 지난 작년 11월 말쯤이었다. 해마다 겨울철이 가까워지면 자주 코가 막히는 손주들이 안쓰러워 우리 부부가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때부터 하고 있는 코세척을 시켰더니 적잖은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아예 식염수 분말을 몇 박스씩 사다 놓고는 매일 저녁 식염수를 만들어 수학공부를 마치면 코세척을 한 후 집에 가도록 했더니 지금까지는 여행 등 특별한 날이 아니곤 빠뜨리지 않고 날마다 곧잘 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6월 초 어느 날이었다. 수영을 마치고 온 은규와 세은이가 좀 피곤해 보여 발마사지를 해주었더니 얼마나 좋아하던지... 다음날부터는 아예 세 놈 모두에게 발마사지를 해주고 있다. 발마사지→수학공부→코세척 순서로...
손주 셋의 발마사지가 즐겁지만 제법 힘들다.
한 놈에 30분 이상이 소요되기에 1시간 30분여를 들여 셋 모두를 마치고 나면 나는 온몸이 나른해진다.
같이 늙어가는 마누라는 내버려둔 채 손주들만 챙긴다는 죄책감이 없지 않았는 데다 삼식이 서방님(?)에게 하루 세 끼 모두를 꼬박꼬박 해 바치는 집사람에게 작은 보답(?)으로 최근 들어 이삼 일에 한 번씩 손주들에 이어서 발마사지를 해주로 했다. 이런 저녁이면 내 몸은 배터리가 방전된 핸드폰 꼴이 되지만 내 기분은 마음에 쏙 드는 자작시 한 수 건졌을 때의 느낌이다.
그래도 나는 지금이 좋다.
조금이나마 손주들의 건강에 도움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지금이 참 좋다.
손주로부터 마사지를 받아도 시원찮을 나이에 손주 발마사지가 웬 말이냐면서 집사람이 웃으며 말릴 때도 있지만 나는 그저 좋기만 하다. 내 손바닥에 쏙 들어오던 원준이의 발이 어느덧 내 발만큼이나 컸을 뿐 아니라 다리엔 나보다 더 많은 털들이 숭숭 돋아있는 모습이 대견스럽다. 축구를 많이 해서 그런지 돌덩이처럼 단단해진 종아리의 뭉친 근육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을 때도 있지만 무탈하게 잘 자라는 모습이 고맙기 그지없다. 그리고 아직은 내 손에 쉽게 잡히는 은규와 세은이의 발마사지를 할 때마다 그 작디작았던 발들이 어쩌면 이렇게 예쁘게 잘 자랐는지..., 발바닥을 마사지하면 간지럽다면서 까무러칠 듯이 깔깔대며 몸부림치던 녀석들이 한 달쯤 지나자 간지러움을 은근히 즐기는 경지(?)에 이르렀다.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손주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모든 것에 감사한 마음이 절로 든다. 손주들의 발과 다리를 마사지하는 동안 멍든 곳은 없는지, 모기 등 벌레에 물린 곳은 없는지 살피다가 상처나 벌레에 물린 곳이 있어 약을 바르다 보면 색다른 행복감이 느껴지면서 발마시가 나에게 딱이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사랑과 정성을 담아 발가락 하나하나 종아리 구석구석을 매만지며 학교생활과 친구들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손주들의 건강을 발원(發源)하는 것은 새로운 재미이자 새로운 행복이다.
새로운 행복이 추가된 지 두어 달
수학공부는 건너뛸지언정 발마사지는 하루도 빠지지 않겠다는 듯 날마다 저녁 숟가락을 놓자마자 쪼르르 우리 집으로 올라오는 정세은, 나와 함께 자는 날이면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며 잠자리에 들어서도 꼭 다리를 내미는 송은규, 바위 같았던 종아리가 말랑말랑해져 좋다는 정원준, 이놈들은 곧 내 삶의 활력소이면서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세은이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과연 팔십까지 요놈들에게 발마사지를 해줄 수 있을까?’
여러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하지만 금방,
“할아버지 사랑해요.”
“할아버지도 세은이 사랑해.”
“할아버지 사랑해요.”
“그래, 할아버지도 원준이 사랑해.”
여느 날이나 다름없이 오늘 저녁에도 발마사지를 받고는 수학공부와 코세척까지 마친 후 나를 꼭 껴안으며 인사를 주고받은 다음 우리 집을 나선 세은이와 원준, 그리고 내 침대에 누워 발마사지를 한 번 더 해달라며 다리를 쑥 내밀고 있는 은규를 바라보며 마음 깊이 다짐했다. 세은이와의 약속을 꼭 지키겠노라고..., 팔순까지 손주들의 발마사지를 책임지기 위해 건강관리를 더욱더 열심히 하겠다고...
발바닥 마사지 때마다 간지럼을 참느라 애쓰며 짓는, 귀여우면서도 익살스러운 손주들의 표정을 떠올리며 헬스장으로 향하는 내일 새벽의 내 발걸음은 깃털보다 더 가벼워질 것 같다.
한 장 한 장 찢기는 달력, 한 해 한 해 사라지는 세월이 아쉽지만은 않다.
지금의 나이가 아니고선 결코 가질 수 없는 행복, 귀하디 귀한 또 하나의 행복이 추가되었다.
현자(賢者)들의 말씀처럼 행복이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요, 다른 사람이 만들어서 주는 것도 아니다.
행복은 오직 나 스스로가 노력하고 만들어야 된다는 것을 새삼 한번 더 깨달은 날이다.
'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지막 헌혈 (6) | 2024.09.17 |
---|---|
일흔한 살배기의 객기 (1) | 2024.08.06 |
계묘년 크리스마스 선물 (2) | 2023.12.26 |
나목문학회의 봄 (0) | 2023.05.05 |
꿩 먹고 알 먹고··· (0) | 2023.0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