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2. 24. 일요일
거실 창밖으로 보이는 근린공원의 모습이 정겨운 아침이다.
독야청청 푸르름을 자랑하던 공원의 老松들이 솔잎마다 눈을 하얗게 이고 있는 모습이 소담스럽다.
어제부터 시작된 3일간의 크리스마스 황금연휴, 지난 3년 동안의 코로나 팬데믹으로 찌든 일상을 보내야 했던 우리들을 위해 모두가 잠든 지난 밤새 하늘이 하얀 크리스마스 선물을 뿌린 모양이다.
해마다 이날이면 어김없이 되살아나는 코흘리개 시절의 추억들...
내 고향에는 나이가 백 살이 훌쩍 넘는 교회가 지금도 있다.
웬만한 부잣집이 아니고는 시계가 없어 예배당의 새벽 종소리는 시계 역할을 톡톡히 하던 시절도 있었다.
언젠가 내가 컴퓨터에서 사주를 보던 중 生年月日은 쉽게 입력했으나 生時가 떠오르지 않아 어머니께 물었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배당 종 치고 한 참 있다가 너를 낳았으니 새벽 5시 반에서 6시 반쯤 될 끼다."
그리고 우리 마을의 교회는 우리 코흘리개들의 놀이터이기도 했다.
교회에 다니지는 않으면서 일요일만 되면 교회 주변을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예배당에 갔더니 눈 감으러 캐놓고 내 신 훔쳐 가더라."라고 목소리를 높였을 뿐 아니라 예배가 한창일 땐 교회의 양철지붕에 돌멩이를 던지거나 몰래 종탑에 올라가 높게 묶여 있는 줄을 당겨 "뎅그렁뎅그렁" 종을 울린 후 도망 다니는 등 예배를 방해하는 게 재미난 놀이였다.
그래도 일 년에 한 번.
해마다 크리스마스 날은 잊지 않고(?) 교회에 나갔다.
크리스마스 날 교회에서 나눠주는 몇 개의 사탕은 어찌 그리 달콤했을까?
산타할아버지 선물은 책에서나 읽었던 시절 추억 많은 교회인데...
얼마 전에 들은 소식에 의하면 지금은 고향의 교회가 쇠락하고 있단다.
이젠 뉴스거리조차 되지 않는 지방 소멸의 광풍이 내 고향을 휩쓴 지는 오래전이다.
한때 전교생이 육칠백 명이나 되었던 고향의 초등학교는 학생이 없어 폐교된 지 벌써 십 년이 넘고, 수백 호의 시골집은 두 가구 중 한 가구는 비어 있는 데다 사람이 살고 있다 한들 노인들밖에 없으니 예배당에 다니는 교인도 몇 안 되는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방마다 벽에 걸린 게 시계이고, 아이부터 노인까지 손목시계 아니면 0.1초도 틀리지 않는 시계가 들어있는 핸드폰이 있으니 자신이 할 역할이 없다고 여겨 입을 다문 것일까? 그마저 아니라면 몇 남지 않은 시골 노인들의 새벽잠을 방해하기 싫어 입을 다문 것일까? 교회에 종탑과 종은 아직 그대로 있지만 종소리 멎은 지는 몇 년이나 되었단다.
아침 식사 후 다시 창밖 풍경에 넋이 빠져 있었다.
대문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아래층에서 원준이와 세은이가 올라오고 옆집에서 은규가 왔다.
일요일은 우리 손주들이 할머니랑 한마음선원에 가는 날. 일요일마다 집사람이 운전해 중학생인 원준이는 학생회 법당으로, 초등생인 은규와 세은이는 어린이 법당으로 데리고 간다. 다음 일요일부터 한 달간은 손주들의 법당이 방학에 들어간다니 내 손주들에겐 오늘이 2023년 마지막 법회 즉 송년 법회인 셈이라 간단한 파티와 장기자랑이 있다며 은규는 복도에서 연신 춤 연습이다.
손주들에게 물었다.
"얘들아! 오늘 밤 산타할아버지로부터 무슨 선물 받고 싶어?"
그러자 원준이와 은규는 말할 것도 없고 초등 2학년인 세은이까지 실실 웃으며 합창한다.
"할아버지, 우리 다 알아요. 산타할아버지가 어디 있어요. 선물은 엄마랑 아빠가 사놓으신 거잖아요."
할 말이 없다. 원준이 어마랑 은규 어미는 어릴 때 산타할아버지가 없다는 걸 알고는 훌쩍거렸다던데...
산타할아버지는 없다는 걸 알고서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손주들. 이제 다 컸구나 대견스러우면서도 왠지 허전했다.
"그럼 내가 산타할아버지 대신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 줄 테니 받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뭐 사 줄까?"
할머니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오르면서 손주들은 또 합창을 한다.
"할아버지는 용돈 주시잖아요. 괜찮아요."
집사람과 손주들이 떠난 집은 적막강산이다.
보름 전쯤 딸이 우리 가족 단톡방에 올린 것을 핸드폰에 저장해 둔 '맘카페의 글'의 캡처본을 꺼내 읽은 후 내복까지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 양재 시민의 숲, 매헌역에서 신분당선을 탄 후 강남역에서 내려 5분여를 걸어 도착한 '헌혈의 집 강남센터"
걷는 것조차 불편할 만큼 인파가 붐비는 강남대로 변의 한 건물 입구에는 커다란 붉은 글씨로 'O형 혈액 급구'라 쓴 종이가 붙어 있었지만 헌혈의 집은 평소와 달리 무척 한산했다. 강남센터의 열 개도 훨씬 넘는 헌혈의자 중에서 두세 대의 의자에서만 머리 모양이 젊은이로 보이는 사람들이 헌혈하고 있었을 뿐 텅 비었다.
서둘러 전자문진을 끝낸 후 내 번호표의 번호가 뜬 문진 간호사실로 들어갔다.
간호사에게 신분증을 건네준 후 혈압체크까지 끝나자 PC에 내 주민번호를 입력하던 간호사가 말했다.
"어르신, 지난 3월부터 6월까지 전립선 치료제 아보타드를 드셨네요."
"네, 그 약을 먹으면 6개월 동안 헌혈을 못한다고 해서 6월 중순까지만 먹었어요. 그래서 6개월 기다렸다가 오늘 왔지요."
"잘하셨네요. 어르신, 오늘도 늘 하신 대로 전혈로 하실 거죠?"
그 말에 깜짝 놀라 핸드폰을 꺼내 간호사에게 캡처본을 보여주면서 말했다.
"백혈병을 앓고 있는 이 아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혈소판성분 지정헌혈 하려고 합니다."
"어쩌죠? 혈소판성분헌혈은 만 59세까지만 할 수 있어 어르신은 전혈이나 혈장헌혈만 하실 수 있어요."
"그럼 전혈 헌혈과 혈장 헌혈 중 백혈병에 도움 되는 헌혈은 어느 거예요?"
"혈장은 주로 약을 만드는데 쓰이기 때문에 전혈 헌혈이 나아요. 전혈로 8번 하면 혈소판 1팩이 나갈 수 있거든요."
"헌혈은 만 69세까지만 할 수 있잖아요. 내가 54년 9월생이라 헌혈은 내년 2024년 9월 중순까지밖에 못하는 게 맞죠?"
"맞아요. 지금은 그래요."
"내년 9월까지 라면 2월, 4월, 6월, 8월 많아야 4번밖에 못하는데... 전에 헌혈하고 받아놓은 헌혈증이 많은데 이것 다 가져오면 이 아이에게 혈소판 한두 팩이라도 줄 수 있나요?
"지난 헌혈증은 안 되고요. 전혈은 오늘부터 8번을 하셔야 해요."
"··················"
'꼭 필요로 하는 아이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 이 아이에겐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겠다 싶어 기쁜 마음으로 집을 나섰는데 이렇게 허사가 되다니···' 크리스마스이브인 오늘도 병실에 있을 아이가 안쓰러웠다. 아무 선물도 주지 못해 미안했다.
1980년대부터 40여 년 동안 별생각 없이 헌혈을 해 오던 중 내 큰손주인 원준이 또래가 백혈병을 앓고 있다기에···, 게다가 그 아이의 혈액형이 나와 같은 A혈액형이라 처음으로 혈소판성분 지정 헌혈을 마음먹었는데···, 내년 9월까지 매달 한두 번씩(혈소판성분 헌혈 주기는 2주에 1번, 연간 24회) 최소한 10번은 혈소판 헌혈을 할 수 있으니 내 헌혈이 이 아이가 건강을 되찾는데 작으나마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싶어 기대했었는데···, 나의 작은 소망이 물거품 되는 데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으니 허탈했다. 지금까진 잘 늙어가는 게 복이다 여기며 지냈는데 순간 나이 듦이 설움으로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전혈로 헌혈을 마친 후 간호원의 지시에 따라 10분 동안 지혈대를 착용한 채 대기실의 소파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며 초코파이를 먹고 있을 때였다. 40대쯤으로 보이는 한 젊은이가 헌혈의 집에 들어와서는 번호표를 뽑고 있었다.
'옳거니' 싶었다. 이 젊은이에게 내가 못한 혈소판성분 지정헌혈을 부탁해야지 싶었다.
젊은이에게 다가가서는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헌혈하러 오셨나 봐요. 혈액형은 어떻게 돼요?"
"그건 왜요? 저는 B형인데···"
B형이라니···, 혈액형이 틀리니 부탁할 수가 없었다.
지하철을 타야겠다는 마음도, 버스를 타야겠다는 마음도 사라졌다.
물거품이 된 크리스마스 선물로 인한 허탈함을 가라앉힐 요량으로 경부고속도로 변을 따라 조성된 길마중길을 걸었다.
하얀 눈이 쌓인 나무 사잇길을 걸었다. 서초동의 한 아파트 옆을 지날 때는 넓은 놀이터에서 원준이 또래의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몇 여자아이들은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 눈뭉치를 굴리고 있고 몇 사내아이들은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름도 성도 모르는 그 아이가 떠올랐다.
'내가 혈소판 헌혈을 할 수 있다면 그만큼 회복이 빠를 텐데···'
'그 아이도 빨리 건강을 되찾아 저 아이들처럼 맘껏 뛰어다녀야 할 텐데···'
그러자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다.
내가 이 내용을 블로그에 올리면 읽은 분들 중 한두 분쯤은 이 아이에게 혈소판성분 지정헌혈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그 아이의 등록번호 등의 정보를 올려본다.
◇ 수혈자 등록번호 : 231206-0028
◇ 요청 의료기관 : 연세의료원(신촌세브란스)
◇ 환자의 혈액형 : A(+)
눈이 내려 더 아름다운, 하늘이 내려준 하얀 선물에 위로를 받으며 길마중길과 양재천을 걸어 집에 들어섰다.
한마음선원에 갔던 손주들이 먼저 와 있었다. 어린이법당의 송년 법회가 엄청 재미있었단다. 앞으로 한 달 동안은 방학이라 떡볶이, 피자, 오뎅, 순대, 튀김 등등 먹거리도 많았단다. 은규는 좀 떨리기는 했었지만 춤을 잘 추었단다.
세 손주들을 차례대로 꼭 껴안았다.
지금처럼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게 더없이 감사한 일이고 최고의 행복이다 싶었다.
내가 지갑에서 지폐 세 장을 꺼내 한 장씩 손에 쥐어주자 세 놈은 웬 횡재는 듯 내 양쪽 볼에 뽀뽀를 해대며 합창했다.
"할아버지, 크리스마스 선물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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