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27. 월요일
헬스장 가기 전에 다녀올 요량으로 서초구 보건소에 갔다.
체력진단실을 찾아가 담당자에게 주민등록증을 꺼내주며 말했다.
"이벤트 상품 받으러 왔습니다. 열네 번째가 제 이름이던데 14등인 거죠?"
"네, 14등 맞아요."
담당자가 내미는 서류의 수령자 난에 이름을 적은 다음 서명을 하면서 물었다.
"제가 30만 보쯤 걸어 14등인데, 1등 하신 분은 도대체 얼마나 많이 걸었대요?"
그러자 그 직원은 책상 옆에 배가 볼록한 채 쭉 줄 세워진 쇼핑백들 중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50만 보 조금 넘어요."
"······················"
50만 보란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내가 살고 있는 서초구의 보건소에서는 몇 해 전부터 구민들의 건강증진에 대한 동기 부여를 위해 한여름과 한겨울 각각 한두 달씩을 제외하고는 매달 걷기 이벤트를 하고 있었는데, 평소에도 '누죽걸산(or 步生臥死)'이란 우스개를 철석같이 믿으며 '하루 10,000보 이상 걷기'를 일상화한 우리 부부는 작년 초에서야 이를 알고는 이게 웬 떡인가 싶어 곧장 이벤트에 참여했다. 작년 1년 동안 걷기 이벤트의 내용은 1일부터 10일까지, 열흘 동안 10만 보를 걸어야 했는데 하루 동안 최대 인정 걸음 수는 15,000보, 즉 하루 동안 2만 보를 걸었다 할지라도 보건소에서 인정하는 걸음 수는 15,000보였다. 그리고 이벤트가 진행되는 동안 참여자는 보건소에서 지정한 장소(예: 양재천, 세빛둥둥섬 등)를 배경으로 자신의 사진을 찍어 보내야 했다. 10만 보이상을 걷고 사진까지 전송한 미션 달성자들 중 추첨으로 오륙십 명의 당첨자를 선정해 선물을 주었는데 작년 이벤트의 경우 매달 10만 보를 겨우 넘기는 내 집사람은 단 한 번도 떨어진 적 없이 100% 당첨된 반면 날마다 15,000보 이상을 걸어 일주일이면 10만 보가 넘는 나의 당첨률은 50%쯤이었다.
선물은 요가 매트, 줄넘기, 무릎보호대 등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운동용품.
그런데 올해 첫 걷기 행사인 이번 3월의 이벤트부터 큰 변화가 있었다.
10일이었던 기간이 15일로 길어지면서 최소 걸음 수는 15만 보로 늘었다.
인정 걸음 수 제한과 사진 촬영이 사라지고 상품은 추첨이 아닌 많이 걸은 순으로 50명을 선정해 준단다.
작년의 경우 매달 조건을 겨우 달성한 집사람이 한 번도 낙방되지 않은 걸 보면 이벤트에 참가자는 기껏해야 100명일듯해 내 걸음 수라면 당첨은 따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다 싶었지만 나는 평소보다 열심히 걸었다. 집사람도 열심히 걸었다.
15일 마지막 캡처를 보낸 후 합산해 보았더니 나는 보름 동안 30만 보를 걸었다. 하루 평균 2만 보···
집사람도 하루 평균 12,000보가 넘는다며 당첨을 확신하고 있었다.
3월 17일 오전, 드디어 당첨자 명단이 떴다.
내 이름과 폰번호는 있는데 집사람의 것은 보이지 않고···
상품을 받아 집으로 돌아오는 걸음이 가벼웠다.
일석이조(一石二鳥), 꿩도 먹고 알도 먹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런 기분도 잠시···, 문득 이벤트의 방식이 좀 바뀌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사로 하루 2만 걸음 이상을 걷는 내게는 이런 방식의 이벤트가 유리하다. 이런 방식이라면 상대적으로 젊고 건강해 많이 걸을 수 있는 남성들만의 잔치가 될 게 뻔한데 반해 정작 걷기 운동이 필요한 여성분, 몸이 다소 불편하신 분이나 연세가 많으신 분들에겐 절대 불리해 아무리 미션을 달성한다 해도 당첨권에 들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다하지 않는다 던데···' '작은 것에도 목숨 거는 사람 많다 던데···' '무리하는 어르신도 없지 않을 텐데···'
그러면서 종전의 방식대로 미션 달성자들 중 추첨을 통해 당첨자를 선정하는 것이 더 좋겠다 싶었다.
아니면 지금처럼 많이 걸은 순으로 하더라도 여성과 일정 연세 이상의 어르신 등의 노약자들에게는 10% 또는 20%의 가산점을 주는 등, 이벤트의 취지를 잘 살려 건강을 위해 걷는 참여자가 많아지고 그 참여자들 고루고루 꿩 먹고 알 먹는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변경되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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