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8. 토요일
조금은 쌀쌀했지만 파란 하늘의 기막힌 날씨였다.
그런데도 컨디션이 별로라며 집사람은 두툼한 등산복을 챙겨 입었다.
신분당선 지하철을 탄 다음 양재역에서 3호선으로 환승했더니 채 20분도 걸리지 않아 도착한 수서역.
오늘은 약 157km의 서울 둘레길 완주의 마지막 코스, 수서역→ 대모산→구룡산→양재 시민의 숲까지 걷는 날.
지난달 코스를 마친 후 식사하면서 마지막 코스는 10월 첫째 토요일인 3일에 걷기로 했지만 하필이면 내가 갑자기 같은 날 친구들과 축령산으로 1박 2일의 산행을 떠나게 되는 바람에 일주일을 연기해 오늘 걷는 것이다.
지난밤을 산행의 설렘으로 설친 탓일까?
아니면 마지막 코스란 섭섭함 때문일까?
집사람이 평소보다 지쳐 보였다.
엎친 데 덮친 격이랄까. 대모산은 첫걸음부터 급경사의 계단이라 더 힘들어했다.
하지만 계단을 다 오르자 깨끗하게 정리된 황톳길이 시작되면서 집사람은 생기를 되찾고, 대모산은 가을비를 하루 이틀 미루었다는 듯이 바람소리. 낙엽소리, 새소리와 함께 따사로운 가을 햇볕으로 우리 부부를 반겼다.
몇 달 전부터 맨발로 흙 밟는 재미에 빠져 수시로 양재 시민의 숲
또는 집 앞 근린공원 흙길을 걷는 집사람이 서울에서는 맨발 걷기의 성지 격인
대모산에 올랐으니 그냥 있다면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는 거나
뭐가 다를까 했는데 역시 벗었으니 나도···
황토라 더 좋은 대모산 흙길
등산객 중 열에 한두 명은 꼭 맨발이다.
바람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가을 오는 소리가 한창인 대모산
대모산의 불국사
대모산을 통과할 땐 늘 정상을 밟는 코스로 걸었기에 처음 보는 절이다.
설악산에 오르면 보게 되는 울산 바위는, 울산에 있던 바위가 금강산으로 가던 중
날이 저물어 설악산에서 하룻밤을 묵었다가 이튿날 아침 그곳의 비경에 마음이 변해 눌러앉았다던데
불국사가 대모산에 있다니···, 경주에 있던 불국사의 어떤 전각이 서울을 그리워하다가
야반도주해 서울 대모산으로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휙 둘러보았다.
석가탑을 아주 조금은 닮은 듯이 보이는 석탑은 있었지만 다보탑이 없는 데다
본존 불상을 모신 경주 불국사의 법당은 '대웅전(大雄展)'인데 반해 이곳의 본존 불상은
'약사보전'에 모셔져 있었으니 이름만 같을 뿐 남남이었다. 그렇다면 이름만 표절(?)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다. 입구의 안내문에 따르면 고려 공민왕 2년에 진정국사께서 창건한 절이란다.
원래의 이름은 약사 부처님을 모셨다 하여 '약사절'이었는데 조선말 고종황제 시절
대모산 남쪽 기슭의 헌인릉에 물이 나는 것을 약사절 주지스님의 도움으로
수맥을 차단했단다. 이를 고맙게 여긴 고종황제께서 '불국정토'를
이루라는 뜻에서 '불국사'란 寺名을 내리셨단다.
대모산 불국사 입구의 바위틈에 놓여 있는 조그만 동자승 인형의 모습이
얼마나 맑고 아늑해 보이던지 잠시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짙어가는
가을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얼굴을 드러낸
'주저, 망설임'이란 꽃말의 서양등골나물 꽃,
꽃말이 '순수, 어머니 사랑, 가을여인'인 구절초
그리고 이름 모를 버섯과 가을을 익히고 있는 가을 햇살
발걸음은 어느덧 '대한항공기 버마 상공 피폭 희생자 위령탑' 앞을 지나
양재 시민의 숲 중심 원두막 앞까지···
여기서 도보 앱 트랭글을 껐다.
10.2km
그리고 4시간 47분
이로써 우리 부부의 대장정은 끝이 났다.
2020년 2월 코로나19가 들불처럼 전국을 덮치자 헬스장, 도서관 등을 비롯한 모든 실내 운동시설과 편의시설이 문을 닫았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집이 아니고서는 진종일 마스크로 입을 틀어막은 채 지내야 했고, '사회적 거리두기'란 듣도 보도 못한 괴물까지 생겨났다. 이 바람에 나는 주중엔 혼자서 양재천을 걸은 후 양재 시민의 숲에서 역기를 들고 주말엔 청계산 구룡산 등 인근 산의 산행으로 건강을 관리하던 중 해가 바뀌어 2021년이 되었는데···
2021년 새해 첫날, 우면산에 올라가 소망탑에 코로나 소멸은 물론 우리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빌고 오자는 나의 감언이설(?)이 통한 덕분에 집사람과 함께 시작한 대장정이 끝났다. '아내와 함께 걷는 서울 둘레길'을 약 21개월 동안 한 달에 한번 정도쯤 19번, 오늘 마지막 코스 10.2km를 걸어 시작점에 도착했으니 총 156.5km의 서울 둘레길 완주다.
총 여덟 코스인 大구간을 19개의 小구간으로 나누어 한 달에 한 구간씩 걸었다.
작년 가을엔 내가 코로나(델타) 확진 판정을 받아 입원을 하고, 올 4월에는 집사람이 코로나(오미크론)에 감염되는 등의 우여곡절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고종사촌 누이들과 안양천 변 등의 두 구간을 걷고, 중곡동 사돈 부부와도 아차산 구간 등의 두 구간을 함께 걷는 등 남다른 즐거움과 행복이 있었던 둘레길의 걸음이었다. 게다가 스스로 자신은 허약한 체질이라 체력이 약하다는 선입관에 사로잡혀 먼 거리 도보엔 지레 겁을 먹었던 아내가 둘레길을 완주하겠다는 집념(?) 덕일까? 이 집념이 헬스, 수영 등의 운동을 더 열심히 하도록 만든 덕분일까? 이젠 10km 전후의 둘레길쯤은 거뜬히 걷는 데다, 심지어 몇 달 전부터는 웬만한 산길은 맨발로 걷고 있으니 얼마나 고맙고 행복한 일인가. 이것만 해도 이번 서울 둘레길은 대성공이다 싶다. 그리고 한때는 맨발로 등산하는 나를 원시인 취급하던 아내가 요즘은 흙길이 보이면 나보다 먼저 신발을 벗는 걸 보고 있을 땐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더니···' 란 말이 틀리지 않음을 깨닫는다.
약 2년에 가까운 세월을 먹어치운 대장정을 끝마쳤더니 시원섭섭하면서 행복하다.
아니 행복은 그대로인데 시원함보다 서운함이 더 큰 것 같다.
한 달에 한 번씩이었지만 집사람은 그때마다 전날 밤부터 설렌다고 하던데···
평일엔 지금처럼 헬스장에서 운동하더라도 한 달에 한 번쯤의 주말은 집사람과 함께 걷도록 애써야겠다.
마음 같아선 한 달 동안 제주살이 하면서 올레길에 도전하고 싶다만 아직은 내 손길이 필요한 손주들이 주는 행복에서 몸을 뺄 수 없으니 몇 해 더 미룰 수밖에 없다. 그러니 지금까지 걸었던 서울 둘레길 코스 중 좋았던 코스를 한 번 더 걷기도 하고, 또 계족산의 황톳길. 해파랑길, 문경새재 옛길 등 하루 이틀로 다녀올 수 있는 코스부터 찾아 地氣를 받아 체력을 쌓아야겠다. 10여 년 후쯤 팔순을 맞는 해에 다시 한 번 더 '아내와 함께 걷는 서울 둘레길' 도전의 꿈다운 꿈을 키우고 가꾸면서···
완주 인증서를 받아 들고는 큰 소원 한 가지를 이루었다며
프로필 사진에 올려놓고 친구들에게 자랑해야겠다는 집사람이 건강에 대한 자신감에
자존감까지 회복한 듯이 보이고, 이를 보고 있던 나의 기쁨과 행복은 덩달아 두 배
혼자 걸었던 첫 인증서, 친구들과 함께 걸었던 두 번째, 그리고 오늘···
세 번 완주한 서울 둘레길에는 같은 듯 다른, 다른 듯 같은 나름의 즐거움과 행복이 있었다.
2020년 혼자서 열흘의 걸음으로 완주했던 첫 번째 둘레길은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때로는 내 마음 가는 대로
걷는 자유로움이 무척 좋았지만 김밥, 커피 등 먹거리까지 혼자 해결해야 하는 외로움은 작은 단점이라 할 수 있겠다.
함께 산행을 자주 한 친구들과 우연히 뜻을 모아 2021년 2월에 시작해 매월 한 번 정도 걸어 지난 6월에 마친 두 번째의
서울 둘레길은 걷는 내내 학창 시절의 추억과 지난날의 삶은 말할 것도 없고 인생사에 나라 걱정, 후손 걱정까지
함께하느라 지루함을 모른 채 걷고는 첫 잔부터 온몸이 짜릿해지는 소맥으로 우정을 두텁게 할 수 있어
좋았지만 일정 조울이 쉽지 않을 때가 한 번씩 생기는 데다 보조를 맞춰야 하는 약점이 있다.
반면 아내와 함께 걸었던 세 번째의 둘레길엔 단점이 거의 없었다.
미리 일정을 정하기도 했었지만
하루 전날 밤에도 "내일 걸을까?" "그래 좋아"
한두 마디에 집을 나설 수 있어 좋았고, 내 가이드와 도움이 절대적이어서 좋았고
함께한 지난 세월 또는 손주 이야기로 어깨를 나란히 할 때도 좋았고 남남처럼 뚝 떨어져
걸을 때는 그때대로 호젓함을 만끽하는 재미가 있었던 데다 하루의 걸음을 마치면
맛집을 찾아가서 마주 앉아 식사에 소주 한 잔은 즐길 수 있어 좋았다.
셋 중에 가장 행복했던 둘레길을 고르라면 당연 세 번째.
딸과 사위 그리고 손주들이
우리 부부의 완주를 축하하기 위해 모였다.
가락몰에서 생선회와 한우로 시작된 작지만 행복 넘치는 잔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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