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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심동체 일심동행

아내와 함께 걷는 서울둘레길(18)

2022. 9. 12. 월요일

추석 황금연휴의 마지막 날

거실로 나오니 새벽이 상큼하게 밝고 있었다. 

두 분의 고모님과 논현동 사모님 등 찾아뵙고 인사드릴 곳은 어제까지 다 다녀온 덕에 오늘은 온전한 공일이 된 데다 9박 10일의 지중해 크루즈 여행을 떠났던 은규네가 귀국하는 날이다 생각하니 활기와 행복감이 배가 되는 느낌이었다.

이를 느꼈을까? 싱크대 문을 여닫으며 주방에서 열심히 뭔가를 챙기고 있던 집사람이 나를 쳐다보면서 말을 꺼냈다.

"은규 오는 날이 되니까 그저 싱글벙글하네요. 손자가 그렇게 좋을까? 손자만큼만 나도 사랑 좀 해보소."

"그럼, 추석에도 못 본 놈인데···. 당신도 원준이나 은규, 세은이만큼 내 사랑 받고 싶으면 다음 생에 내 손주로 태어나슈."

"그건 그렇고, 오늘 둘레길 걷기로 했잖아요."

"은규 오는 날인데 우리 토요일에 걸으면 안 될까?"

"여보, 은규 인천공항 도착시간이 5시래요. 그때까지 시계만 쳐다보고 있자는 말이에요? 준비 다 했으니 둘레길 가요."

그러고는 식탁 위로 사과, 자두, 포도 등의 과일뿐 아니라 초콜릿, 사탕, 떡, 견과류 등 온갖 먹거리를 올려놓았다. 

그래서 내가 조금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둘레길 걷자는 거여? 소풍 가자는 거여?"

 

커피와 두 가지 과일만을 넣은 배낭을 둘러메고 집을 나섰다.

사실 지난달 둘레길을 마칠 땐 이번 둘레길은 9월 3일에 걷기로 했었다.

하지만 이번 추석은 거리두기 해제 후 처음 맞는 명절이라 누이들의 제안에 따라 추석 전 마지막 주말이었던 지난 9월 3일에 우리 5남매 모두가 함께 부모님의 산소를 찾아가서는 함께 벌초도 하고 성묘도 하기로 뜻을 모았기에 둘레길 걸음을 추석 이후로 미루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3일을 전후해 '힌남노'인지 검은 놈인지 하는 역대급의 태풍이 한반도에 상륙한다는 특집 뉴스가 계속되자 대구에 사는 막내 여동생이 형님과 내게 전화를 했다. 사라호보다 큰 태풍이라 빗길 운전은 너무 위험하다면서 서울에선 내려오지 말라고 했다. 5남매 공동 성묘는 다음으로 미루고 이번엔 자기 부부 둘이 3일 아침 일찍 산소에 가서 정성을 다해 벌초를 한 후 간소하게나마 성묘까지 하겠단다. 

예전엔 그저 "아들, 아들···" 했었지만 지금은 역시 아들보다 딸이 훨씬 나은 세상이구나 싶었다.

양말 한 켤레면 큰 선물이었던 어린 시절의 추석 등을 떠올리며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추석연휴 덕분에 전세를 낸 듯 이렇게 텅빈 신분당은 처음.
오늘 둘레길의 출발지 올림픽공원역

성내천을 따라 곳곳에 피어 있는 달개비꽃

소갈증에 좋다면서 옛사람들이 즐겨 달여 먹었다는 소문이 전해져 온 덕에

한때는, 아니 지금도 당뇨병에 무척 좋은 약초 대접을 받기도 하는 잡초 중 하나인데

한 시간 전쯤 올림픽공원역으로 오는 지하철 안에서 읽었던, 오늘 새벽 

한 밴친이 시문학 밴드에 올린 '자주 달개비'란 시가 떠올랐다.

 

자주 달개비 / 이화금

 

담장 밑 향기 내뿜고

아침을 설레게 하는 너

 

눈물 닦아줄 이 없던

그 시절

보랏빛 너를 눈에 담으며

위안 삼았었는데

 

꽃잎 닫힌 모습이

늘 수건 질끈 동여맨

어머니 모습만 같아서

보듬어 안았던 너

 

기별도 없이 찾아와

고향의 추억 모조리

내려놓는구나

 

성내천 변에는 봉숭화꽃도 만발해 있었다.

국민학교에는 들어갔을 때였을까?

누이들을 따라 봉숭아꽃을 따다 돌로 찧어 열 손톱 모두에 얹어 헝겊으로 칭칭 감쌌다가

다음 날엔 친구들이 여자라고 놀리는 바람에 분홍빛으로 물든 손톱을 깨진 유리병조각으로

긁어내느라 애먹었던 소중한 추억의 꽃 봉숭아, 봉숭아꽃은 보기만 해도 행복했다. 

 

매혹적인 색깔의 꽃잎을 활짝 열어

"Good morning"

아침인사를 하는 나팔꽃 

 

적당히 흐려 걷기에 딱 좋은 날씨지만 30여분을 걷자 등줄기에 땀이 송글송글

 

둘레길에서 맨발 산행에 재미 붙이기 시작한 집사람이 흙길이 없어 신발 속의 발이

너무 답답하다더니 나지막한 공원에서 흙길을 만나자마자 신발을 벗어 내게 들게 하곤 엄청 좋아했다.

 채 1km도 안 되는 거리였지만 나는 흙길을 걸으며 좋아하는 아내의 모습이 더 보기 좋았다.

 

장지천을 따라 언덕 군데군데 피어있는 메꽃,

나도 한때는 이 꽃을 분홍 나팔꽃으로 알았듯이 많은 사람들은 나팔꽃으로 알고 있다.

내가 이 꽃은 나팔꽃이 아니라 토종식물인 '메꽃'임을 알고 쓴 나의 자작시

 

메꽃은 더 이상 울지 않는다.

                                             돌담/이석도

 

젊은 시절의 메꽃은 곧잘 울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세상이 싫었다.

대대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자신을 외래종인

나팔꽃으로 아는 사람이 적지 않아 속상했다.

 

아빠들이 꽃밭에 매어 놓은 새끼줄을 따라

하늘 높이 올라가는 나팔꽃들을 볼 때마다

기댈 지푸라기 하나 없는 제 신세 서러워

눈물을 자주 흘렸지만 이젠 울지 않는다.

 

세계인의 버킷리스트 된 알프스 초원을

수채화보다 더 아름답게 꾸미는 꽃들은

자기처럼 하늘과 비와 바람밖에 모르고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잡초의

웃음이라는 얘길 듣고부터다.

 

메꽃은 오늘도 방실방실

대대로 지켜온 땅을 더 아름답게 가꿔

손자 물려줄 생각에 꽃잎 활짝 연다.

(2021. 5. 15.)

 

 

☞ 메꽃 : 언덕, 들, 바닷가 등에서 쉽게 몰 수 있는 야생화.

언뜻 보면 나팔꽃처럼 생겨서 혼동하기 쉬운 꽃이지만 나팔꽃은 일 년생으로 꽃이 남보라색인 반면

메꽃은 다년생으로 연분홍색이라는 것이 차이점이다. 나팔꽃이 우리 토종 꽃 같지만 사실은 인도 원산의 외래식물이고,

메꽃이 진짜 우리 토종식물로 꽃말은 ‘충성, 수줍음, 속박’이다.

 

목도 축일 겸 과일을 먹기 위해 장지천의 어떤 다리 아래의 그늘에 자리를 잡았을 때였다.

집사람이 놀란 듯이 말했다.

"여보, 오늘 은규 생일이네···, 카톡이라도 보내야겠다."

"아, 그러네. 지금쯤 비행기 타고 한창 오고 있겠다. 나도 카톡 보내야겠다." 

 

 

마침내 우리의 발길은 탄천에 이르고···

'숯 굽은 까만 물'이 내려오는 강이라 붙여진 이름 탄천(炭川)

그러나 '숯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게 무척 맑은 물이 흐르는 탄천

8월 중순의 폭우와 며칠 전 역대급의 태풍에 둔치를 아름답게 꾸미고 있었던

아름드리나무들의 뿌리째 뽑힌 모습이 곳곳에 보이긴 했지만

탄천의 넉넉함과 여유로움, 아름다움은 여전했다.

   

올림픽공원역에서 수서역까지 약 3시간 동안 10km쯤 걸었다.

山이 없어 크게 오르내리는 길이 없는 데다 호박꽃을 비롯한 가을꽃들의

인사를 받으며 곳곳에 세워져 있는 설화 등 재미난 이야기들을 많이 읽어서일까? 

아니면 몇 시간만 있으면 은규를 만난다는 기대 때문일까?

오늘은 조금도 힘들지 않은 건강 걸음,

행복의 걸음이었다.

 

이젠, 수서역에서 출발해 대모산과 구룡산을 거쳐 시민의 숲까지 걷는

한 코스밖에 남지 않은 서울둘레길이라 아쉬움이 없지 않은 데다 추석 연휴의 둘레길로

가락 수산시장 인근까지 걸었고, 은규의 생일까지 겹친 날이라 집사람에게 맛난 점심을 사고 싶었다.

친구들과 몇 번 갔었던 가락몰의 맛집으로, 그곳에 갔을 때마다 싱싱한 회를 얼마나 맛나게 먹었던지

수서역까지 걷는 날에는 집사람을 꼭 데리고 와야겠다 마음먹었던 일식당이 생각나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번이나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 걸 보니

추석 연휴 동안은 문을 열지 않나 보다 싶어 3호선을 타고

교대역 부근의 맛집 '태평양일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