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8. 6. 토요일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어 망설이는 나와 달리 집사람은 서둘렀다.
포카리 스위트와 생수 등 마실 것만 챙기는 나와 달리 아침식사를 준비하던 집사람은 그 바쁜 와중에 과일은 있어야 된다며 기어코 사과와 자두를 씻어 내 배낭에 쑤셔 넣고 만다. 거실 창문을 열고 하늘을 살펴보니 옅은 구름이 많았지만 비는 쉽게 내리지 않을 듯 보이긴 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게 여름 날씨다 싶어 비옷 2벌과 우산 2개를 배낭에 챙겨 넣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집사람과 함께 서울둘레길 걷는 날.
총 19개 구간으로 나누어 걷고 있는데 오늘은 17번째 코스로 오늘 걸으면 완주까지 두 개의 구간만 남는 셈이다.
일주일이 넘도록 지속된 열대야 탓인지 눈뜰 때부터 피로가 싹 가시지는 않은 듯했지만 오늘 코스가 8km 남짓한 비교적 짧은 거리인 데다 山이라고 해봐야 높이가 기껏 134m인 일자산밖에 없으니 공먹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집을 나서자마자 높은 습도 때문인지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신분당선→논현역에서 7호선→군자역에서 5호선
그리고 지난번의 종착지였던 고덕역
고덕역에서 출발!
남남으로 만난 부부도 오래 함께 살면 닮는다더니
43년째 함께 살고 있는 집사람도 어느덧 나를 닮았나 보다.
맨발 걸음에 재미를 붙인 집사람은 일자산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따라
신발을 벗고는 이런 험한 산길도 곧잘 올랐다.
이집(李集)의 본관은 광주(廣州), 초명은 원령(元齡), 자는 호연(浩然), 호는 둔촌(遁村)이다.
고려 충목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공민왕 17년(1368년)에 신돈의 미움을 사 생명의 위협을 받자 영천으로 도피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이때 몸을 숨기기 위해 지내던 곳이 둔굴이다. 공민왕 20년(1371년)에 신돈이 죽자 개경에 돌아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여주 천녕현(川寧縣)에서 시를 지으며 일생을 마쳤다. 조선 개국 후 판전교시사(判典校侍事), 참의(參議)를 역임한 동료인 방순(方恂)과 함께 숯골에 은둔하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둔촌 선생께서 후손에 이르기를···=
독서는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하느니 시간을 아껴서 부지런히 공부하라.
늙어서 무능하면 공연히 후회만 하게 되니 머리맡의 세월은 괴롭도록 빠르기만 하느니라.
자손에게 금을 광주리로 준다 해도 경서 한 권 가르치는 것만 못하느니
이 말은 비록 쉬운 말이나 너희들을 위해서 간곡히 일러둔다.
일자산을 벗어날 무렵 족히 20m는 됨직한 소나무를 타고 올라
기어이 주황색 꽃잎을 활짝 열어젖힌 능소화가 눈에 띄자 숲길을 걷는 동안
군데군데 서서 나를 반기던 좋은 詩들을 읽었던 덕분(?)일까?
몇 해 전 自作했던 '능소화'란 詩 한 편이 떠올랐다.
능소화
여름마다
높은 담장 기어올라
주황색 귀 나팔처럼 활짝 열고
발자국 소리 듣는 꽃
오늘도
하늘 치솟은 빌딩 사이 걸터앉아
오가는 뭇 남자들 추파마다
붉은 미소 보내지만
임 아닌 손
닿기만 해도
툭!
제 몸 던져버린다.
첫사랑 잊지 못한 소화는
장맛비가 천년 전설 씻을 적에도
임 향한 마음엔 빗물 한 방울
적시지 않았나 보다.
(201.9.1.)
우리가 사는 양재동에 많은 비가 온다며
비 걱정을 하는 딸에게 괜찮다고 한 지 10분은 지났을까?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금방 우산은 무용지물의 폭우 수준이 되었다.
산을 다 내려온 데다 인근에 생화, 화분 등을 파는 비닐하우스들이 많아 꽃집 처마 밑에서 20여분
기다렸더니 비가 잦아들어 우산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시작 때부터 30 ºC의 기온에 높은 습도로 땀이 줄줄 흘렀던 8.9km.
하지만 울창한 나무 사이의 흙길로 이루어진 일자산 숲길은 맨발로 걷기에 더없이 좋았다.
싱그러운 여름 내음에 취해 숲길을 걷던 중 '갑오회'라는 우리은행 출신 갑장 모임의 친구도 만나고···
집사람과 나란히 또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근 4시간 동안을 땀에 젖어 걷고
비에 젖어 걸은 덕분일까 올림픽 공원역에 도착했을 때 우리 부부는
행복에 흠뻑 젖어 음식점을 찾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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