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6. 1. 수요일
서울시장, 도지사, 군수 등 지방자치단체의 장과 시의원 군의원 등 지방의회 의원을 선출하는 임시 공휴일이지만 미리 사전 투표를 했던 터라 마음이 느긋한 아침이었다. 게다가 약속 장소인 사가정역으로 가려면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신분당선 지하철을 탄 후 양재역에서 3호선으로 환승한 다음 또다시 고속터미널역에서 7호선 지하철로 환승해야 했었지만 그저께였던 5월 28일, 신분당선 종점이 강남역에서 신사역까지로 연장 개통된 덕분에 신분당선을 탔다가 논현역에서 곧장 7호선으로 갈아타면 된다 생각하니 몸마저 느긋해진 날이다.
집사람과 함께 서울둘레길을 걷기로 한 날이다.
지난 5월의 둘레길을 화랑대역에서 시작해 사가정역까지 걸었으니 오늘은 사가정역에서 시작해 용마산과 아차산을 거쳐 광나루역까지, '서울둘레길 안내지도'에 표시된 거리는 4.6km밖에 안 되는 비교적 짧은 코스다. 게다가 지난달에 이어 오늘도 중곡동 사돈 부부와 함께 걷기로 애 마음이 편했다. 사돈들은 원준이와 세은이가 "아차산 할아버지" "아차산 할머니"로 부를 만큼 용마산과 아차산을 자주 오르시는 분들이라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코스다.
집사람이 챙긴 과일, 떡 등 몇 가지의 먹거리를 넣은 배낭을 메고 집은 나섰다
집을 나서서 매헌역으로 향하는데 열흘쯤 전부터 좀 불편하던 오른 발목 안쪽이 시큰거렸다.
'접질린 적이 없는데···' '요즘 너무 많이 걸었나···'
5월 18일(수)엔 은행 동우회의 마니산 시산제, 5월 21일(토)엔 재경 동문회의 청계산 등반대회, 5월 29일(일)엔 이륙회 친구들과 서울둘레길 3-3코스를 걸었던 걸 떠올리니 최근에 많이 걷긴 걸었구나 싶었다. 하지만 약 7년 전 정년퇴직 다음날부터 서울에서 고향 청도까지 걸었을 때랑 속초에서 부산까지의 해파랑길을 걸었던 불과 수년 전만 해도 하루에 40km 이상의 거리를 열흘 이상 연속해서 걸어도 하룻밤 푹 자고 나면 거뜬했었는데···,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구나 싶으면서 집사람이 낌새를 채면 또 운동 줄이라는 잔소리만 나올 게 틀림없어 아무렇지도 않은 양 살짝살짝 땅을 밟았다.
신분당선에서 곧바로 7호선으로 환승하니 정말 편리했다.
3호선 지하철 환승 하나 빠졌을 뿐인데도 족히 20분은 절약되는 것 같아 좋았다.
약속 장소 사가정공원에 먼저 도착해
시원한 냉커피로 우리 부부를 맞으시던 중곡동 사돈 부부
한중(閑中)
白髮紅塵閱世間 (백발홍진열세간)
世間何樂得如閑 (세간하락득여한)
閑吟閑酌仍閑步 (한음한작잉한보)
閑坐閑眠閑愛山 (한좌한면한애산)
한가로움 속에서
홍진에 백발이 되도록 세상을 살아보니
세상살이에 그 어떤 즐거움이 한가로움 같으랴.
한가히 시 읊고 한가히 술잔 들며 한가히 산보하고
한가히 앉아 쉬고 한가히 잠들며 한가히 산을 즐기네
두어 달 전에 코로나를 겪었던 집사람이
사가정 공원에서 급경사가 계속된 오르막조차 크게 힘들어하지
않을 만큼 체력이 좋아진 것 같아 보는 내가 행복했다.
깔딱 고개 입구의 스탬프 부스
용마산에서 바라본 북한산
아차산성
사적 제234호. 테뫼식에 속하는 말굽형 산성이지만 규모가 크며 성 안에 작은 계곡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해 축조된 백제의 '아단성'으로 볼 수 있다. 실제 그 기능은 백제 왕성인
하남 위례성으로 추정되는 몽촌토성을 방어하는 시설로서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즉 한강 북안에 자리 잡고 있는 지형적 조건을 이용해 한강 상류와 하류 쪽에서 올라오는 선박의 움직임을 빨리 포착하여 왕성으로 연락해주는 진성이었다. 475년 고구려군에게 백제 왕성이 함락되었을 때 개로왕이 붙잡혀 죽은 곳이 이 산성 밑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온달장군이 실지회복을 위해 출정해 신라군과 싸우다 전사한 곳을 이 산성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므로 아차산성은 삼국 항쟁기에 각별한 방어요새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오랜 역사와 멋진 이야기를 가진 아차산성이 허물어져 제 모습을 잃고 있어 아쉬웠다.
하루속히 남한산성처럼, 한양도성처럼 제대로 복원되어 온 국민들이 즐겨 찾는 장소로 태어났으면···
오늘은 스탬프를 2개나 찍었다며 좋아하던 집사람은
이젠 4개밖에 안 남았으니 빨리 찍고 싶다며 다음 코스는 언제 걸을까
벌써 폰에서 카렌다를 꺼내놓고 날을 꼽았다.
스탬프를 찍은 후 사돈댁으로 가는 길에 만난 아차산의 기원정사
1978년 창건한 대한불교 조계종 직할교구 사찰인데 수형(樹形)이 빼어난 소나무들들이 무척 많다.
둘레길 스탬프를 찍은 후 아차산 허리를 돌아 도착한 사돈댁
몇 해 전에도 한 번 다녀간 적이 있지만 계절이 달라서일까? 그때는 보지 못한 보물이 보였다.
상추, 가지, 오이, 고추, 돌나물, 부추, 깻잎, 감자, 토마토, 더덕, 방풍, 방아, 취나물 등
야채는 없는 게 없고, 몇 그루밖에 되지는 않지만 블루베리, 아로니아, 오가피,
대추나무 등 갖가지의 나무들이 푸짐하고 싱싱하게 자라는
옥상 텃밭은 사돈댁의 보물 중 보물이었다.
바깥사돈은 갓 도축한 한우 1++이라며 등심을 잔뜩 사 오시고
안사돈과 내 집사람이 옥상 텃밭에서 함께 야채를 바로 뜯어 씻어
옥상 그늘막 아래 상을 차렸으니 이보다 맛난 진수성찬은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사돈께서 반주(飯酒)로 직접 산에서 채취한 귀물로 담근 술을 내놓았는데
한 병은 어린아이 팔뚝 만한 송이(松栮) 버섯이 잠겨 있는 송이주요
다른 한 병은 항암효과가 뛰어나다는 와송(瓦松)이 두 개나
담겨 있는 와송주였으니 마치 不老酒처럼 보였다.
입에 착착 달라붙는 불로주를 주고받는 동안
코로나를 몰랐던 때 광주 사돈 부부, 중곡동 사돈 부부, 우리 부부
이렇게 3쌍이 함께 보길도에 갔던 이야기, 청산도에서 안개에 갇혔던 이야기
사량도의 펜션에서 누렸던 행복 등등 이야기꽃은 질 줄을 몰랐다.
머잖아 절친 세 부부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기로 약속하곤
자리에서 일어나 배낭을 둘러메는데 헉!
과일 등 먹거리는 산에서 다 먹었고 물통도 다 비웠는데····
통통해진 배낭을 열어 보았더니 없었던 비닐봉지들이 가득했다.
옥상 텃밭에서 뜯은 상추 등 갖가지의 푸성귀가 봉지마다에 들어 있고
풋성귀 봉지들 아래 묵직한 것은 안사돈께서 담그신 몇 년 묵은 된장이란다.
올 때보다 몇 배나 더 무거워진 배낭을 메고 돌아가는 걸음
어깨는 아플 만큼 묵직했지만 마음은 파란 하늘 떠다니는 뭉게구름처럼 가벼웠다.
70에 다가가는 인생 참 잘 살았다 싶었다. 아니 잘 살고 있다 싶었다.
내일은 집사람 몰래 발목에 침이라도 한 대 맞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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