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은 원준이가 문화센타에 "트니트니" 놀이 가는 날이었다.
평소처럼 퇴근해 문화센타 헬스장에서 열심히 운동하고 있는데 카톡이 들어왔다.
세라가 우리가족 그룹채팅에 보낸 카톡이다. 준이가 오늘 트니트니는 할머니랑 가고 싶어한다며
엄마 시간이 어떤지 묻는다. 매주 금요일이면 엄마랑 다니던 원준이가 이젠 할머니랑 같이 오는 친구들이 부러웠던 모양이다. 집사람이 4시20분에 어린이집 가서 원준이를 데리고 문화센타에 가겠노라는 답장을 보고는 헬스를 조금 일찍 마치고 트니트니교실로 올라갔다. 할머니와 함께 하는 풍선놀이에 푹 빠져있던 원준이는 할아버지까지 합세하니 더 신이 나는 모양이다. 얼마나 재미가 있었던지 다음에 또 할머니랑 트니트니 오자는 우리 원준이는 내가 담아간 호박죽을 호박 요플레라며 남김없이 먹었다..
집사람이 저녁준비를 하는 동안 원준이와 못 다한 놀이를 하고 뽀로로 만화영화를 보고있는데 원준이 아빠가 퇴근해 들어오면서 무슨 전화를 받더니 우울한 표정으로 ' 친구가 죽었다.'며 10시경 세라와 함께 문상을 가야하니 원준이를 좀 재워 달란다. 동진이와 소꼽친구로 고등학교 까지 같이 다닌 친구라는데, 3년전 舌癌(혀의 암)이 생겨 고생한다더니 한 달전에는 또 아산병원에 입원했다며 병문안 가고, 며칠전에는 이천에 있는 호스피스로 옮겼다며 휴가까지 내고 찾아가더니 결국 허망하게 떠났단다. 동진이와 동갑인 친구는 세라와 같은 나이의 아내와 우리 원준이와 동갑내기인 아들만 남겨 둔 채... 아빠없이 자라야 할 아기의 상처와 한창 행복해야 할 나이에 사랑하는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아내의 애절함, 젊디 젊은 아들을 먼저 앞세운 부모님의 심정을 생각하면서 많이 아픈 마음으로 故人의 극락왕생과 冥福을 빌고, 어린 아기가 큰 상처 없이 잘 자라길 빌었다.
한창 즐겁게 노는 원준이를 씻겨 아기띠를 매어 안고 공원을 한바퀴 어슬렁거리니 한참동안 노래 부르며 재잘더리더니 어느새 조용해졌다. 이쁘게 잠든 준이를 잠자리에 뉘고 색소폰 연습을 다녀온 후 원준이 옆에 누웠다. 퇴근후 회식에 갔다온다며 보라가 왔다. 병돈이는 직장동료들과 한 잔하고 퇴근하는 중이라며 만나 같이 집에 갈거라면서... 조금있으니 동진이가 문상 다녀왔다며 전화하면서 보라에게 동서와 한잔했으면 했다. 친한 친구를 잃어 마음이 많이 울적한가 보다. 아직 병돈이가 오지않아 대신 내가 갔다. 세라랑 셋이서 치킨에 소주를 두병째 마시고 있으니 보라와 병돈이가 오겠단다. 집옆에 새로생긴 퓨전 요리집으로 자리를 옯겨 두 딸과 두 사위를 데리고 한 잔 하면서 문상갔던 이야기를 듣는데...원준이와 동갑인 故人의 아들이 빈소에 켜진 촛불을 생일케익의 촛불인양 박수치고 불면서 뛰어노는 모습이 세라와 원준이 모습이 겹쳐져 너무 슬프고 가슴이 아린다. 어쩜 아들이 이런 큰 슬픔을 모르는 게 차라리 다행인지 모르겠다 생각하면서 넷이서 오랜만에 편하게 한잔 하도록 나 혼자 집에 와 원준이 옆에서 잠을 청했다.
토요일, 일찍 일어난 원준이와 아침먹고 거의 12시가 되도록 세라와 동진이가 연락이 없다.
매장가는 길에 들린 세라는 지난 밤에 네명이 2시가 넘도록 마셨는데 동진이는 집에 가더니 먼저 떠난 친구를 생각하며 생전에 더 잘하지 못했음을 후회하면서 오랫동안 오열했단다. 또 친구 영안실로 간 동진이는 오늘은 영안실에서 밤을 새고 일요일 발인은 물론 용인의 장지까지 갔다 올거라며 오늘 하루 더 원준이를 재워 달랜다. 언제든지 OK다. 동진이가 해외출장 갔을 때는 일주일도 데리고 잤는데...낮잠에서 일어난 원준이를 데리고 시민의 숲으로 갔다. 제법 쌀쌀한 날씨인데도 놀이터에는 아이를 데리고 놀러온 젊은 부부들이 많았다. 원준이는 처음보는 아이들에게 " 친구 안녕! 나는 원준이야"라며 잘 어울려 논다. 한참을 놀더니 갑자기 내 손을 이끌고 가게로 가잔다. 작년 가을까지 자주 놀던 곳이라 익숙한 모양이다. 가게에 들러 과자 한봉지를 사들고 벤치에 앉아 과자를 먹는 원준이에게 청설모 두 마리가 다가왔다. 골프장 등 다른 곳에서 만나는 청설모는 작은 인기척만 있어도 나무위로 달아나기 바쁜데, 시민의 숲에 사는 청설모는 사람을 반기는 듯 모여들었다. 아이들이 주거나 흘린 과자 부스르기 주워먹는 재미에 野性까지 잃어 버렸나 보다. 비록 잣 농사와 호두농사에 큰 피해를 입히는 동물이지만 인간의 패스트 푸드를 먹고 몹쓸병에 걸리면 어쩌나? 알록 달록한 다람쥐가 없는 이곳에서는 다람쥐 역할을 대신하는 놈인데... 매점부근에는 지난 가을까지 갖가지 꽃들로 기쁨을주던 잔디밭 화단이 있는데 지금은 꽃이 한송이도 없지만 흙을 갈고 손질한 걸 보니 가족들이 많이 찾아 오면 새로운 모습과 즐거움을 선물하기 위해 또 다시 꽃씨를 뿌린 모양이다. 화단을 지나치는데 원준이가 나를 쳐다보며 두 팔을 벌리며 "하부지..." 하자고 했다. 작년 가을꽃이 한창일때 화단 이 쪽끝에 내가 앉아 있고 저 쪽 끝에서 원준이가 "하부지..." 하면서 두 팔벌려 달려와 내 품에 안겼던 놀이가 기억나는 모양이다. 그때의 감동이 떠오르고 우리 원준이가 원하는데 그냥 갈 순 없지... 귀여운 우리 원준이. 할아버지와 함께라면 언제나 푹 자는 원준이를 재우고 연습을 다녀와서는 원준이 옆에 눕고, 딸 세라는 엄마랑 같이...
일요일이다. 수영장에 데리고 갔으면 좋으련만 넷째 일요일은 문화센타가 휴장하는 날이라 아쉽다. 그물위를 풀쩍 풀쩍 뛰는 놀이시설인 실내 놀이터에서 오전을 보내고 걸어 오는데 한참 걷던 원준이가 나한테만 하는 행동인 내 앞을 가로 막고는 퉁명스럽게 "안아 줘" 한다. 내가 "안돼, 할아버지 힘들어"하니 원준이는 "왜, 힘들어? 원준이 할아버지 사랑하는데..." 안아주지 않을 수가 없다. 요즘은 원준이와 같이 걷거나 안고 걸으면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재잘거린다. 보이는 가게, 보이는 건물마다 "하부지 여기는 어디야?" 묻고 답하는 재미가 여간 쏠쏠하지 않다. 일부러 "할아버지는 모르겠는데..." 그러면 "맘마 먹는 데야." "뽀미병원이야." 라고 알려주면서 "하부지는 몰랐어? 왜 몰랐어?" 묻는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게 늘어나는 원준이 어휘력이 그저 놀랍고 대견스럽다. 덕분에 별로 말이 없는 나도 원준이와 있을때만은 막 말문을 연 아이처럼 말이 많아진다. 원준이와 함께 낮잠에서 일어나니 매장을 직원에게 맡긴 세라와 아웃백에서 점심을 먹는데 세라 가게에 손님이 많이 몰려 난리란다. 부랴 부랴 세라를 태워주고 저녁무렵 집사람과 함께 하나로 마트에 갔다. 장을 보는 동안 카트를 탄 원준이는 즐겁기만 하다. 집에 돌아 온 원준이는 "뽀미 배는 똥배, 원준이 손은 약손"하며 뽀미 배를 쓰다듬으며 놀던 원준이에게 저녁을 먹이고 나니 8시 반이 넘었다. 씻기고 재울시간이 되었는데도 동진이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다. 세라가 "벌써 왔을텐데... 집에서 잠든 모양이다."라고 하길래 원준이를 데리고 갔더니 정말 한 잠이 들었다. 밤새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장지까지 다녀 왔으니 얼마나 피곤했을까...
원준이를 보내고나니 마음은 허전하지만 몸은 홀가분했다. 매일 퇴근 후 어린이집을 하원시켜 같이 지내며 저녁을 먹이는 게 일과인데 2박3일동안 Full로 데리고 놀고, 씻기고, 먹이고, 재우면서 잠시도 긴장을 풀지 않아서 일까? 아니면 60이 되어 체력이 떨어져서 일까?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피로가 몰려들었다. 집사람 옆에 누워 "힘들다." 한마디 하고 잠을 청하는데, 30여년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집사람 혼자서 쌍둥이 두 딸을 키우면서 얼마나 힘들고 고생했을까? 너무 미안하고 도우지 못한게 후회스러웠다. 家事 도우미는 고사하고 친정(전남 고흥)과 시댁(경북 청도)조차 멀리있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는데다, 남편인 나까지 쌍둥이를 내 몰라라 하고 허구헌날 은행일을 핑계로 밤늦게 다녔으니... 그럼에도 연약한 집사람이 혼자서 쌍둥이를 훌륭히 잘 키웠고, 두 딸이 건강하고 바르게 잘 자라 이제는 행복한 가정까지 이루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젠 손자랑 손녀를 키울때는 집사람 몫까지 내가 하리라 다짐했다.
월요일 아침, 집사람은 나를 보더니 "눈이 쑥 들어 갔네요." 그러는데...
또 원준이가 보고싶다. 출근길에 들리까?
어린이집 하원시키러 갈까?
(할머니와 트니트니교실)
(청설모가 왔어요)
(내 손은 약손, 니 배는 똥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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