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7. 15. 수요일
올 2월 하순부터 매일같이 그러하듯 오늘도 해거름녘에 양재천을 10km쯤 걷고는 근력운동을 하기 위해 양재시민의숲으로 향했다.
울창한 녹음이 터널처럼 만들어 어둑어둑한 시민의숲 산책로를 크게 한 바퀴 돈 후 어린이 놀이터 부근에 다달았을 때였다. 바로 눈앞에서 덩치 큰 포크레인이 더위 먹은 한여름의 강아지가 숨을 헐떡이듯 힘겨운 소리를 내면서 한창 땅을 파고 있었다. 몇 달 전부터 노후시설물 개선공사가 시작되었지만 관리실, 화장실 등 오래 된 기존의 건물을 철거한 후 새 건축물을 완공하던 지난주까지는 아주 느긋한 듯 보이더니 막바지가 가까워 바빠졌는지 금주에 들어서는 땅속에 묻힌 하수관을 교체하느라 산책로 곳곳을 파헤쳐 놓았다.
공사현장을 피해 걷던 중 내 눈에 확 띄는 게 있었다.
땅속에서 들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폐하수관이었다.
새까만 오물이 눈에 들어왔는데, 직경이 50cm는 됨직한 폐하수관의 속을 절반쯤 채운 상태였다.
장마철 뿐아니라 많은 비가 내렸을지라도 다음 날에 시민의 숲을 찾으면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이 고여 있는 물이 거의 없길래 배수시설이 아주 잘 되어 있으리라고만 생각했었는데 하수관이 이렇게 절반이나 막혀 있을 줄이야.
세월 앞에 장사 없다더니 괜한 말이 아니다 싶었다.
양재시민의숲은 1986년 서울아시아경기대회와 두 해 후 있을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을 위해 조성된 시립공원으로 1986년 11월에 개장되어 우리 나이로 벌써 서른다섯이나 된다고 하니 이 35년이란 세월이 그냥 두지 않은 모양이다.
문득 시민의숲 나이의 곱절에 가까운 내 나이와 함께 지난주에 있었던 한일은행 입행동기들의 모임에서 한 친구가 들려준 자신이 최근에 겪었던 건강이야기가 떠올랐다. 해마다 건강검진을 받는 검진센터에서 지난 이른 봄에도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심장CT를 촬영했단다. 그런데 검진 결과 심장으로 향하는 한 혈관이 70% 정도 막혔다는 소견과 함께 종합병원에 가 보라며 진료의뢰서 끊어 주길래 강남에 있는 큰 병원에 가서 스탠스 시술을 받기로 했지만 당시는 코로나19가 서울에서 기승을 부리던 때라 병원에서 입원 및 시술날짜를 잡을 수 없었단다. 그러던 중 지난 6월 중순쯤에 시술날짜가 잡혀 코로나19 검사에서 음성이 확인되자 입원을 했고, 시술을 받기 위해 침대에 누워 시술실로 향했단다. 큰 수술이 아니기에 그 이전까지는 크게 동요되지 않았는데 침대에 얹혀 시술실로 향하면서 아내와 이별할 때는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과 걱정 등 정말 야릇한 기분이 들더란다.
시술하기 전 손목의 혈관을 통해 조영제를 주입해 혈류를 살피는 과정이 있었는데 부분 마취상태라 볼 수 있음은 물론이고 의사들의 말소리를 다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단다. 팔뚝 혈관을 통해 뭔가가 쭈욱 들어가는 느낌이 들고 잠시 후 의사가 "시술은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하더란다. 마침내 시술은 취소 되고···
기분이 무척 좋더란다.
몇 분 후
마주 앉은 담당의사는 CT상으론 70%쯤 막힌 줄 알았는데 60% 정도 막힌 것 같고, 피가 100% 흘러야 정상이지만 90%는 흐르며 평소 계단을 오를 때 가슴 통증이 없다니 우선은 시술보다 약물치료를 하면서 추적관찰을 하자고 했단다.
그래서 친구는 의사선생님께 물었단다
"그럼 앞으로 생활은 어떻게 하는 게 좋습니까?"
그러자 의사는 이렇게 대답하더란다.
"신경 너무 많이 쓰지 마시고 지금처럼 사세요. 다만 틈틈이 운동도 하시고···"
자연이든, 人工이든, 인간이든 세월을 거슬릴 수는 없다.
얼마나 정(淨)하게 사용하느냐, 얼마나 소중히 다루느냐 등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내구연수가 달라질 뿐.
人工物에는 부품을 깡그리 교체해 내구연수를 크게 늘릴 수나 있지만 인간의 몸은 작은 부품 정도라면 모를까 그것마저 허용치 않고 있으니 그저 정(淨)하게 쓰고 소중하게 다루면서도 녹슬지 않게 관리를 잘 하는 수밖에 없겠다 싶었다.
하지만 '노후화'든, '노화'이든 이것은 어쩌면 자연이 주는 큰 선물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폐하수관을 절반이나 막은 새까만 오물을 떠올리며 시민의숲 산책로를 한 바퀴 더 돌았다.
친구의 건강이야기를 떠올리며 바벨의 중량을 살짝 높여 힘차게 들어 올렸다.
-여름꽃 만발한 양재천 산책로-
코로나19로 인해 서초구립 언남문화체육센터가 2월 하순부터 Closed된 덕분(?)에
내게 헬스장 러닝머신 몇 갑절의 재미로 유산소 운동을 즐기게 해주고 있다.
-양재시민의숲 맨발공원 운동기구-
헬스장 휴관 이후 초기엔 아파트 바로 앞의 근린공원의 운동기구로 근력운동을 했으나
그곳엔 사람들이 많은 데다 중량별 바벨의 종류가 몇 개밖에 없어 고민하던 중 찾아낸 시민의숲 맨발공원.
한낮에도 소나무 그늘이 좋은 데다 운동하는 사람마저 몇 안 될 뿐 아니라 바벨의 중량이 다양해
유산소 운동으로 양재천을 걸은 후 근력 운동을 하고자 했던 내겐 최고의 명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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