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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심동체 일심동행

아내와 함께 걷는 서울둘레길(2)

2021. 2. 12. 금요일

정월 초하루.

60여 년 전쯤의 오늘은 일 년 중 가장 행복했던 설날이다.

빈농의 오 남매 중 한가운데라 새 옷 입는 설빔을 해마다 누릴 순 없었지만, 새 다비(양말) 한 켤레에도 발걸음이 가뿐했던 그 시절의 설날이 그립다. "오늘은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어른들의 농담을 곧이곧대로 믿고는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서까지 잠들지 않으려 애썼던 그때의 섣달 그믐날 밤. 일어나자마자 우물가로 가서는 고양이 세수를 한 후 후다닥 안방으로 뛰어들다 보면 문고리에 손이 쩍쩍 얼어붙던 그 시절의 설날 아침. 고향 마을이 집성촌이라 洞民 대부분이 종친이었지만 아침 일찍 나름 곱게(?) 차려 입고는 웃각단에 있는 가까운 집안의 어르신부터 차례대로 네댓 집을 찾아가서는 세배를 올린 후 제사를 지내고 떡국을 먹곤 했었는데···, 아드님이 대구에서 비누와 양초를 만드는 큰 공장을 운영하는 덕에 동네에서 가장 큰 부잣집 중 하나였던 양촌댁에 세배를 가면 할아버지와 아지매 등 모두가 꼭 세뱃돈을 주셨는데 그게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던지···, 그래서 그 시절의 나는 일 년 내내 설날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기껏해야 10원짜리 동전 한두 개이었을 텐데···

30여 년 전의 오늘도 행복에 들뜨긴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콩나물시루 같은 만원 열차를 타야 할 때도 있었지만 아내와 함께 두 딸을 데리고 은행에서 마련해 준 귀성버스를 스무 시간 가까이 타고 고향을 가서는 양손 가득 선물 꾸러미를 든 채 "엄마"를 외치며 대문을 밀고 들어갈 땐 온 세상을 다 얻은 듯했었는데···, 참기름 들기름 등 엄마가 바리바리 싸 주신 보따리를 들고 서울로 돌아오는 날, 버스가 고개를 넘을 땐 눈앞이 절로 뿌옇게 되곤 했었지만···. 

10년 전까지만 해도 설날은 여전히 행복한 날이었다.

설 또는 추석이 되면 고향에 계시던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서울로 역귀성하셨는데···

서울역으로 마중을 나가면 과일 채소 등 손수 농사지으신 온갖 먹거리를 다 넣은 보따리들을 양손에 무겁게 든 채 두 분이 환히 미소를 지으시며 개찰구를 빠져나오시곤 했었는데··· 우리 집에 머무르시는 동안 두 분을 모시고 바깥나들이뿐 아니라 고모집 등 친인척의 집을 다녀오면 무척 좋아하셨는데···

 

그런데 오늘은···

오늘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지방(紙榜) 앞에 놓인 제주잔에 술 한 잔조차 따를 수 없다.

작년 설 무렵에 누군가에게 붙어서 들어온 코로나 19가 일 년 내내 우리의 일상을 멈추게 한 것도 모자랐는지 지난가을부터 자기 세상인양 활개를 치면서 온 나라를 들쑤시더니 이번 설날엔 우리 국민 모두의 발을 아예 묶어 버린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5인 이상의 사적 모임 금지···

설날이지만 형님 댁으로 차례 모시러 갈 수 없게 된 우리 부부

평소의 명절에 형님 집으로 가기 위해  나서는 시간보다 두 시간가량 느지막이 집을 나섰다.

신분당선과 과 2호선 지하철을 탄 후 사당역 4번 출구로 나와서는 관악산 쪽으로 걸으면서 시작한 집사람과 함께하는 서울 둘레길 두 번째 도보. 

 

관악산 관음사 가기 전에 있는 서울 둘레길 5-1코스 스탬프 부스.

집사람은 기왕이면 스탬프북에 스탬프를 예쁘게 찍겠다며 조심조심···

  내가 작년에 홀로 완주했던 서울 둘레길의 세 번째 날에 걸었던 코스가 바로 관악산(사당역-석수역} 코스였다.

하지만, 집사람과 함께하는 오늘은 그 코스 중 절반쯤인 사당역에서 서울대 옆의 관악산 일주문까지만 걷기로···

 

 

관악산 관음사

내가 작년에 홀로 완주했던 서울 둘레길 도보에서 이곳을 통과하던 날은

바로 사월 초파일(양력 2020. 4. 30.), 이곳에 들렀을 때 보살들께서 

관음사에 오는 모두에게 절편을 한 봉지씩 나눠주셨는데

그 절편이 얼마나 맛나든지 지금 생각해도

입 안에 저절로 침이 고였다.

 

처음인 줄 알았는데

집사람도 관음사에 와 본 적이 있단다.

십오륙 년 전쯤, 때론 동생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나를 각별히 챙겨주셨던 재일교포 安 회장님께서

내가 울산지점 지점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돌아가셨는데 그때 회장님의 사십구재를

이 사찰에 지냈었단다. 그 덕분에 관음사를 몇 차례 다녀갔었단다.

 

대웅전의 부처님께 삼배(三拜)를 올리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강감찬 장군의 영정 앞에서 참배하던 중

불현듯 지난해 7월에 별세하신, 호국영웅 백선엽 장군이 떠올랐다.

나라를 구한 고려 시대의 영웅은 천 년도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이렇게 사당을 짓고 동상을 세워

고인의 업적을 기리는데···, 낙동강 以南을 제외하곤 모두를 김일성軍에게 빼앗겨 태풍 앞의 촛불 신세가 된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구한 현대사의 영웅을 일제 강점기 시절에 일본군 중위였다는 이유로

동족상잔의 6.25 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모든 功은 깡그리 무시한 채 '親日' 운운하면서

현충원에 있는 장군 묘지의 파묘를 주장하는 양아치들이 설치고 있으니

내 손주들이 살아갈 우리나라의 앞날이 크게 걱정되었다.

 

집사람은 안국사와 낙성대공원을 둘러보면서 감탄했다.

아이들에게 좋은 공부가 되겠다며 원준이와 은규, 세은이를 데리고 한 번 더 오자고 했다.

 

평소 산행 때 보다 좀 무거웠던 배낭.

무게가 족히 10kg는 넘겠다 싶었더니 역시 ···

많이도 넣었다. 김밥에 컵라면, 컵라면 끓일 뜨거운 물,

산행 중 마실 물, 커피, 사과, 단감, 감말랭이, 한라봉, 견과류 등등

혼자 십수 키로를 걸을 때도 생수 한 병에 김밥 한두 줄이면 그만인데

절반밖에 안 걷는 오늘, 먹을 것은 몇 배다.

넉넉해서 좋았다.

 

오늘도 두 개의 스탬프 성공

 

색다른 설날의 반나절이었다.

무엇보다 집사람이 크게 힘들어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차츰차츰 둘레길에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아 더 큰 다행이다.

부모님께 제주(祭酒) 한 잔 올리지 못한 아쉬움을 관음사에서 달래고,

콧속을 간지럽히는 은은한 솔향과 연둣빛을 걸치고 싶어 맑은 하늘에 초리를

흔들어대는 나목의 몸짓에서 혹한의 겨울에도 봄은 오듯이 우리를 떠난

마스크 없는 일상의 행복도 곧 오겠다는 기대를 가질 수 있었다.

 

양력 정월 초하루에 시작한 서울 둘레길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지만 오늘 음력 정월 초하루에 

두 번째 걸었더니 완주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다.

오는 3월 1일의 세 번째 걷는 날에도

오늘처럼 데이트하는 마음으로

오늘처럼 소풍 나온 기분으로

오늘처럼 행복에 푹 젖어

걸으리라 마음먹었다.

 

지하철 서울대입구역 도어에 적힌 詩

집에 와서는 딸과 사위 그리고 외손주들로부터 세배를 받았으니

오늘이 설날은 설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