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8. 월요일
전날처럼 5시에 눈을 뜬 집사람은 좀더 침대에 누워있고 싶어 했다.
하지만 오늘은 이번 도보여행 마지막 날로 속초해변까지 20여km를 걸어 미리 예약해 둔 오후 4시 30분에 출발하는 서울행 고속버스를 타야 하는데다 日出을 보기 전에 아침식사까지 할 작정이기에 늦장 부릴 시간이 없다고 잘 구슬려 5시 40분쯤 모텔을 나서서는 전날 저녁을 먹었던 음식점으로 갔다. 황태해장국을 주문하자 첫 손님이라며 반긴 아주머니는 덤으로 계란 프라이까지…
아침식사를 건너뛰었던 어제와는 달리 시원한 황태해장국으로 뱃속을 든든히 채운 후 일출의 멋진 광경을 한 번 더 보고 싶어 삼포해변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앞서 걷는 집사람의 발걸음이 무척 무거워 보였다.
삼포해변에 도착하자마자 집사람은 벤치에 앉더니 발목과 발등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2014년 10월엔 열흘 동안 하루 백 리씩 400km를 걸었고, 또 작년 10월엔 13일 동안 하루 40km씩 천삼백 리를 걸었던 나에겐 하루 오십 리(20km) 정도의 도보쯤이야 가벼운 운동이라 할 수 있지만, 그저께는 비를 맞으며 11km를 걷고, 어제는 난생 처음으로 22.35km란 먼길을 종일토록 걸었던 집사람에게는 좀 무리가 되었던 모양이다. 거의 매일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가끔씩 양재천변을 10km쯤 걷긴 하지만 연이은 장거리 도보로 발에 탈이 생겼나 보다.
양말을 벗게 한 후 내가 스포츠겔을 발라주고 동전 파스를 붙여준 다음 한참을 주물러주자 한결 나아졌다며 다시 걷기 시작했지만 전날과 달리 발걸음은 여전히 무거워 보였다.
그때였다.
수평선이 불꽃이 핀듯 빨갛게 물들었다 싶더니 이내 샛빨간 구슬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전날과 다름 없는 멋진 일출의 광경이었다.
햇님이 다 솟아 오를 때까지 나는 햇님을 향해 빌고 빌었다.
내 손자의 건강과 우리 가족을 행복을…
집사람의 기도소리도 들려왔다.
그런데 집사람의 기도는 나와 달랐다.
'일체 모든 중생의 건강과 행복, 우리나라의 평화와 통일'을 빌고 있었다.
가다 쉬고, 가다 쉬면서…
쉴 때마다 집사람의 발을 주물러 주면서 걸었지만 여전히 힘겨워하는 집사람이 안쓰러웠다.
문암리 신석기 유적지와 고암해변을 지나 청간정이란 정자에 올라서는 한 폭의 그림과 같은 동해바다를 눈에 담고, 가슴에 담고, 사진에 담을 때는 바닷물이 동해를 가득 채운 것처럼 행복감이 내 가슴과 집사람 가슴을 빈틈 없이 채웠다. 하지만 3km쯤을 더 걸어 캔싱턴해변에 도착하자 집사람은 발이 아파 더 이상 걷기는 힘들겠다며 나머지는 버스를 타고 가잔다.
아직은 고성군이지만 속초가 코앞인데…
하지만 집사람에게 이번 도보여행의 동행을 당부하면서 뭐라고 했었던가.
오십 리를 걷든, 십 리밖에 걷지 못하고 포기하든 “당신의 뜻에 따르겠다.” 하지 않았던가.
하루를 걷든, 한 시간만 걷든 “당신이 힘들어 하면 완주 욕심은 버리겠다.”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속초가 아닌 고성군에서 차를 타기엔 아쉬움이 너무 컸다.
슬쩍 인터넷으로 검색하였더니 목적지인 속초해변까지는 약 8km
가장 가까운 속초의 漁港인 장사항까지는 2.7km
한 시간만 더 걸으면 속초라고 집사람을 달래면서 다시 걸었다.
씹는 동안 피로와 통증을 잊을 수 있을까 싶어 밤나무 아래서 알밤을 주워 주면서…
마침내 속초시임을 알리는 아치가 보이고 조금 더 걷자 이번엔 장사항 이정표가 나타났다.
드디어 속초시 장사항 도착.
시간은 오전11시 50분.
도보거리는 14.9km
장사항 도로변에 즐비한 횟집을 보면서 가진항에서 먹었던 물회를 떠올리며 어느 집의 물회가 이모네처럼 맛날까 고민하던 중, 한 횟집의 간판과 건물 곳곳에 큼직한 글씨로 국내에서 최초로 얼음접시를 개발했다느니, TV에 8번이나 방영된 장사항 맛집이라느니 그리고 해초물회가 별미라는 등의 문구가 눈에 띄어 들어갔는데 글쎄….
물회의 내용물과 물회의 맛은 영…
식사를 마치고는 인근 건어물 가게에 들러 몇 가지의 건어물을 산 후 택시를 불렀다.
택시로 5km여를 달려 도착한 속초해변.
이곳이 바로 이번 도보여행의 최종 목적지였다.
그리고 또 내가 작년에 했던 520km 도보여행의 출발지점이었으니 그냥 지나치기 싫어 집사람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는 고속터미널로 가서 4시 30분 출발의 승차권을 2시 출발 승차권으로 바꿔 버스에 올랐다.
오후 2시 정시에 출발한 서울행 고속버스.
집사람은 집에 도착하면 옷만 갈아입고는 곧장 찜질방에 가야겠다며 좋아하지만 나도 좋았다. 마지막 5km의 도보를 포기한 아쉬움이 없지 않았지만 2시간 30분이나 빨리 출발함으로서 나를 기다리는 원준, 세은 그리고 은규를 그만큼 빨리 볼 수 있다는 기쁨이 아쉬움보다 더 컸으니 나는 어쩔 수 없는 손자바보구나 생각하며 지난날들의 도보여행과 이번 도보여행을 회상했다.
나는 혼자 걷기를 좋아했다.
도보여행은 하루에 40km 이상을 걷는 장거리여야 하다는 아집에 집사람과의 동행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떼를 지어 걷거나 또는 한두 명의 다른 이들과 함께 걸으면 보조를 맞추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등 배려하고 동행자에 신경을 써야 하는데 나는 이런 게 싫었다. 혼자 걸으면서 쉬고 싶으면 쉬고 걷고 싶으면 걸으면서, 빨리 걷고 싶으면 빨리 걷고 천천히 걷고 싶으면 천천히 걸으면서 혼자서 온갖 생각을 다 하는 자유로움과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게 좋아 준비과정은 말할 것도 없고 실제의 도보여행까지 늘 혼자서 하곤 했다. 2014년 10월에 고향까지 걸었던 열흘간의 천 리길 도보여행 때는 9일 동안 혼자 걷다가 마지막 하루의 대구에서 고향까지 구간을 한 고향친구와 둘이서 걸었던 적이 있고, 작년 10월에 걸었던 속초→부산 간 520km의 도보여행 시에도 12일 동안 혼자 걸었다가 마지막 날 하루, 부산 정관에서 부산역까지의 구간을 중곡동사돈과 둘이서 걸었었는데…
이런 저런 정담을 나누고 술잔을 나누는 재미가 꽤 쏠쏠하기도 했지만 뒤쳐질 새라 아니면 너무 앞설 새라 또는 부담이 될 새라 부담을 느낄 새라 조심하고 신경 쓸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육신은 피곤할지라도 혼자여서 행복했던, 늘 자유롭기만 하던 영혼이 얼마간은 구속되는 것 느낌이었다.
그런데 작년 도보여행 중 구룡포 해안을 걸을 때였다.
내 앞에서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이야기를 나누며 느린 걸음으로 걷는 초로의 남녀가 있었다. 나의 빠른 걸음에 금방 따라 잡힌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서울에 살면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2박 3일의 일정으로 해파랑길을 걷는데 하루의 도보거리를 딱히 정하지 않고 소문난 맛집이 있으면 그곳에서 맛난 음식을 먹고 분위기 좋은 찻집이 있으면 그곳에 들러 차를 마시면서 걷는다고 했다. 그래도 평균 하루에 20여km 전후를 걷게 되더라고 했다.
그들의 다정함과 여유로움이 보기에 아주 좋고 무척 부러웠다.
그들을 보는 동안 나도 언젠가는 집사람과 그들처럼 도보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했으니,
어쩌면 그때 쌓였던 부러움이 이번 도보여행을 강행하게 했는지 모를 일이다.
이번 도보여행은 대성공이다.
마지막 5km의 구간을 택시로 이동함으로서 비록 완주는 하지 못 했지만 나 혼자서 목표했던 54km 중 49km는 걸었으니 달성율이 90.7%다. 점수로 치면 100점 만점에 적어도 90점은 받은 셈이 아닌가.
더구나 도보여행이라면 두려움부터 내보이던 집사람이 이번 도보여행의 성취감에 스스로를 무척 대견스러워하다 못해 다음에는 문경새재길을 걷자, 강릉 주변의 해파랑길을 걷자고 할 만큼 도보여행에 자신감을 나타내고 재미를 붙였으니 이 보다 더 큰 보너스가 어디 있으랴, 나 또한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어 걸으면서 맛난 음식을 먹고 분위기 좋은 찻집에서 차를 마시면서 더없는 여유로움과 행복을 만끽했으니 이번 여행은 100점 만점에 100점.
이제부터는 남은 인생의 길도 이번 도보처럼 집사람의 걸음과 삶에 보조를 맞추어 여유롭고 다정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걸으리라 다짐하면서 고속버스의자를 뒤로 눕히곤 또다른 행복을 찾아 꿈나라로…
캔싱턴 해변
7번 국도변 산기슭에 서 있는 소나무 두 그루
집사람은 이 소나무들을 보면서 부부 소나무라고 했다.
정말 그랬다.
오래 함께 살다 보면 서로 닮게 된다는 인간의 부부처럼 이 소나무 두 그루는 굽은 모양이
똑같다 싶을 만큼 닮은 데다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으려는 듯,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상대방을 향한 나뭇가지는 키우지 않고 반대 방향의 가지만 무성히 자라고 있어
이들을 보는 내내 내 가슴엔 나도 집사람과 더 닮은 모습으로 인생길을
걸어야겠다는 마음이 싹텄으니…
드디어 속초市界를 알리는 아치가 나타나고…
속초 장사항 도로에 즐비한 횟집들 중
요런 광고 문구가 나를 현혹하였으니…
나를 현혹한 간판의 횟집 해초물회
값은 서울보다 더 비싼 1인분에 2만 원
그런데 이럴 수가…
'빛 좋은 개살구'가 따로 없다.
가진항 이모네랑 동일한 가격임에도
내용물이랑 맛을 비교할 때 이모네가 100점이라면 이것은 40점도 후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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