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 13. 목요일
어제 하루 종일 내린 비는 봄비였나 보다.
집을 나서서 지나치는 공원이 조금은 낯설게 보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앙상하게 보이던 나목(裸木)은 초리마다 봄을 살짝 머금은 듯 살쪄 보이고, 촉촉이 젖은 땅에서는 지난가을 날아와 묻혔을 민들레 씨들이 겨울잠에서 깨어 기지개 켜는 소리가 들리는 듯할 때는 머잖아 봄이 오려나 싶었는데 공원 안의 축구장을 겸한 매헌초등학교 운동장에서는 초등 3학년인 정원준 또래쯤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공을 차고 있었다. 그들의 즐거워하며 내뱉는 함성과 겉옷을 내팽개친 채 뛰노는 모습은 이미 봄이었다.
시민의숲 지하철역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버스정류장으로 걸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도착한 740번 버스에 올랐는데 대부분의 승객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빈자리가 꽤 많았지만 나 혼자 마스크를 하지 않은 것 같아 입구 쪽의 맨 앞자리에 앉았다.
2월의 두 번째 목요일인 오늘은 입행동기들과 점심 모임이 있는 날.
설연휴 이후, 지난 2월 1일 리버사이드 호텔에서 있었던 친구 딸의 결혼식에만 참석 했을 뿐 나머지의 날들은 모두 집과 헬스장에만 오갔으니 근 보름만의 외출인 셈이다. 설 연휴 시작과 함께 각종 매스컴을 달군 우한폐렴이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 사회를 올스톱 시켰다.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도 엄청나지만 몇 해 전 빠른 전파력으로 온 국민을 불안케 했던 사스와 메르스보다 더 강력한 전파력으로 국내에서도 우한폐렴 확진자가 속출하자 공공기관과 지자체는 대부분의 행사를 취소하거나 연기하고 이러한 두려운 뉴스에 개인들도 스스로 모임을 취소하거나 자제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이런 분위기와 감염 우려 탓에 서초문화원에서도 모든 강좌를 2월 말까지 휴강하는 바람에 내가 매주 수요일마다 詩공부를 하는 '심상문학'이란 강좌도 휴강 되었다.
그뿐 아니라,
고향 친구 모임
이륙산악회의 태백산 눈꽃산행
우리은행 출신 갑장들 모임인 갑오회
우리은행 출신 동문들 모임인 이수회
심상출신 시인들의 모임인 나목문학회
문학의 강 수필가 모임인 심지문학회 등등…
오늘 모임을 제외한 2월 모임은 모두가 취소 되었으니 동네를 벗어날 일도, 달리 할 일도 없었다.
하지만 오전엔 집 앞의 공원에 있는 서리풀 문화체육센터의 헬스장으로 가서 오후 2시까지 땀을 흘리고, 오후에는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에서 돌아오는 외손주들과 행복 쌓는 재미에 빠져 지낸 덕분에 하루해가 짧기만 했었으니…
모임장소는 을지로 3가역에서 가까운 부산복집.
지하철을 이용하면 훨씬 빠를 뿐 아니라 어르신 교통카드가 있어 공짜이지만, 오랜만에 하는 시내 나들이라 시간이 조금은 더 걸리고 백병원앞 정류장 하차로 몇 백 미터를 더 걸어야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차창을 통해 봄이 오는 모습을 즐기고 싶어 버스를 탔다. 양재역과 뱅뱅사거리를 거쳐 강남역 사거리를 지나면서 나타난 강남대로는 평소의 모습이 아니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는 이 시간대 강남역의 강남대로 양쪽 인도는 얼마나 붐비는지 어깨를 부딪히지 않고는 한 발자국도 걸을 수 없으니 '인산인해'란 단어가 딱 어울리는 인파인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평소의 절반, 아니 평소의 1/3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들 또한 대부분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우한폐렴이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정말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다.
15명이 자리를 함께한 부산복집.
서빙하는 아주머니는 육수가 팔팔 끓는 냄비에 복어를 투하했다.
그러고는 두 국자의 마늘과 고추가루, 미나리 등을 듬뿍 넣으면서 말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얼씬도 못 할 거예요."
회장이 일어나 인사말을 했다. 모든 모임들을 취소하는 요즘의 분위기를 이아기하면서 자신과 총무가 오늘의 모임을 예정대로 추진할 것인지 아니면 취소할 것인지 고민을 많이 했단다. 요즘의 사회 분위기를 보면 오늘의 모임도 취소하는 게 마땅하지만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파력이 아무리 세다 해도 우리 74동기 친구들이 약주(藥酒), 독주(毒酒)와 폭탄주까지 즐기는데다 뜨거운 우정을 나누고 있으니 우리 74동기들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藥과 毒과 폭탄, 뜨거운 우정의 열기에 자신이 죽을까 봐 두려워 감히 침투하지 못 할 것 같아 취소하지 않았다며 건강의 염원을 담은 건배사를 했다. 회장과 총무의 인사와 건배사에 이어 우정이 듬뿍 담긴 술잔은 몇 순배나 춤을 추었다.
불콰한 얼굴로 식당 문을 나서는 친구 모두에겐 어떤 바이러스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건강미가 넘쳤다.
하루빨리 우한폐렴이 진정되어 우리 국민 모두가 예전처럼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곧 들려올 봄소식을 반갑게 맞고, 아름다운 봄꽃을 불안 없이 맘껏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 2월 14일에 떠나기로 한 원준네의 홍콩 크루즈여행은 취소될 수밖에 없었지만 은규네의 5월 초 지중해 크루즈여행은 아무런 차질 없이 계획대로 다녀올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우한 폐렴을 비롯해 모든 근심 걱정이 봄눈 녹듯 싹 사라지길 기도해 본다.
방방곡곡에 웃음꽃과 행복꽃이 만발하는 봄,
봄다운 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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