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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46년 묵은 추억을 꺼내다.

 

 

 

2020. 2. 12. 수요일

올 연말쯤 예정인 베트남 푸꾸옥으로의 가족여행 비용에 내 용돈을 아껴서 보탤 요량으로 적금 통장을 만들기 위해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우리은행 포이동지점으로 갔다. 안방마님이 곡간 관리를 하는 데다, 대부분의 금융거래를 인터넷뱅킹으로 할 뿐 아니라 가끔씩 인출하는 용돈도 자동화기기를 이용하기에 은행에 들어갈 일이 없었으니 무척 오랜만의 은행 출입이었다.

사십 수년을 하루같이 드나들었던 내 일터였던 은행인데도 왠지 좀 어리둥절했다. 

떠난 지 5년밖에 되지 않는 우리은행 지점의 모습임에도 많은 게 낯설었다.

평소라면 대기 고객들로 한창 북적일 시간임에도 직원들만 보일 뿐 영업장은 텅 비어 있었다. 

작년 말 중국 후베이의 우한에서 발생해 강력한 전파력으로 온 세계인을 불안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우한 폐렴'이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 국민의 해외여행은 말할 것도 없고 은행을 찾는 발길마저 묶은 것 같았다.

은행에 들어서서 번호표를 뽑자마자 소리가 들렸다.

"딩동!"

소리와 함께 내 번호표의 숫자가 한 창구의 알림판에서 깜박거리고 있었다.

내 번호가 깜빡이는 창구로 다가가자 창구의 여직원이 착용한 마스크를 살짝 내리며 맞이인사를 하고는 다시 썼다. 하기사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설연휴를 전후해서 온 세계로 전파되었을 뿐 아니라 지금은 중국에서만 확진자가 6만 명에 근접할 뿐 아니라 사망자도 1,300명을 넘었다 하지 않던가.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도 감염자가 29명이나 발생한 데다 몇 해 전에 있었던 사스와 메르스보다 전파력이 훨씬 강하다는 뉴스에 온 국민이 바깥 활동과 사람과의 대면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 실정인데, 하루 종일 고객들과 얼굴을 마주 보며 상담하면서 일하는 게 주된 업무인 창구직원들이야 말로 얼마나 불안할까? 그들이야 말로 마스크 착용이 마땅하다 싶었다.

마스크를 착용했지만 내가 알아듣기 쉽게 또박또박 말하는 여직원의 태도는 여간 친절하지 않았다.

내 주민증을 받아든 여직원이 컴퓨터의 자판을 두들기더니 나를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

"아! 선배님이시네요. 언제 퇴직하셨어요?"

"2014년 9월에 했으니, 벌써 5년이나 됐네요." 

그런데 창구 여직원이 업무처리를 하나하나 할 때마다 뒤에 서 있는 한 젊은 남자직원이 고개를 내밀어 쳐다보면서 노트에 뭔가를 적곤 했다.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게 민망했을까?

여직원은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연수 중인 신입행원인데 OJT(On-the-Jop-Training) 나왔어요." 

그러고는 필기하고 있는 젊은 남자직원에게 다가가서는 속삭였다.

말하면서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나를 퇴직한 선배라 소개하는 듯했다.

그러자 젊은이는 나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지만…

'연수 중인 신입행원'이란 말에 내 몸은 어느새 타임머신을 타고 있었다.  

 

46년 전 이맘때였던 1974년 2월.

까까머리가 서너 달을 자라 약간은 더벅머리가 된 나는 경북 청도 촌놈의 때를 벗기고 있었다. 

아직은 교복이 더 잘 어울리는 나이에 말쑥한 양복을 걸치고 넥타이를 맨 채 소공동에 위치한 한일은행 본점에서 수십 명의 입행동기들과 함께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신입행원 연수를 받은 후 첫 근무지를 발령받았던 1974년 2월. 그런데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서일까 연수기간 동안 은행원답게 빛의 속도로 돈을 세기 위해 약지손가락으로 한 장씩 넘기는 지폐 세는 연습이랑 지폐를 부채처럼 펼쳐 한 번에 5장씩 세는 연습을 했던 기억만 뚜렷할 뿐 나머지 추억은 내 기억력의 한계를 벗어나 버린 모양이다. 예금, 대출, 내국환, 외국환 등 은행업무 모두를 배우긴 했으리라. 또 지금이야 모든 것이 자동으로 계산 되고 산출되지만 당시에는 대출이자는 물론 예금이자 등 모든 계산을 주산()로 하던 때였으니 수시로 잔액이 변동 되어 계산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 당좌대출, 정기적금, 수시 입출예금 등의 이자계산에 필요한 적수()를 뽑는 방법도 열심히 배웠으리라.

연수를 마친 후 본점 영업부로 발령을 받아 어음교환업무를 담당하던 중 본부 교환반으로부터 받아 온 어음과 수표 중 5만 원권 자기앞 수표 한 장이 사라진 바람에 두 분의 선임자와 함께 본점 건물의 엄청 큰 쓰레기장에 들어가서는 늦은 밤까지 불을 밝히곤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를 한 장씩 한 장씩 뒤져야 했지만 수표를 찾아낸 덕분에 변상을 면했을 뿐 아니라 선임자로부터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얻어 마셨던 추억. 틈만 나면 출납계 정사대에서 지폐를 세어 묶곤 했던 추억.

그 시절의 달콤함이 어디 이뿐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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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 보면, 파란 꿈과 희망이 늘 나를 감쌌던 그때가 가장 싱그러웠던 시절이었다. 

이젠 몸이야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지만 마음만이라도 그때처럼 싱그러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의 첫 발령지였던 영업부가 있었던 당시 한일은행 본점 건물

 

 

옛 건물을 헐고 신축한 한일은행 본점 건물 

하지만 IMF 사태로 인한 상업은행과 합병하는 바람에 훗날 롯데백화점에 매각되었으니…

 

 

 

 

 

정기적금 가입을 축하하면서 은행직원이 챙겨 준 사은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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