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는 이야기

지공선사 되다



2019. 9. 19. 목요일


'지공선사"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뜻을 제대로 몰랐던 단어였다.

나보다 5,6년쯤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면서 한번씩 '지공선사',란 낱말을 쓰기에 나는 그 단어를 들으면서, 처음에는 '백수를 좀 품격 있게 말씀하시느라 지공도사라 하는구나.' 생각했었지만, 나중에는 '저 선배님들은 절에 다니면서 불교공부를 같이 하시는 도반(道伴)들인가 보다.' 여겼을 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낱말이 2014년, 나와 같은 해에 우리은행을 정년퇴임한 甲長들의 모임에서도 들리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지공선사'가 뭘까 궁금했다.


국어사전에서 나는 찾았다.

지공선사의 한자는 地空禪師임을,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만 65세 이상의 노인을 이르는 낱말'임을.

누가 作名을 했는지 알 순 없지만 이름을 지어도 기가 막히게 잘 지었다 생각하면서…

지금의 '노인 지하철 무료승차'의 뿌리는, 과거 국가발전을 위해 과도한 희생을 치른 어르신들께 보답하기 위해 1980년에 만든 복지제도의 하나란다. 다만 당시에는 만 70세이상 노인에게 대중교통 요금을 50% 할인해 주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그런데1984년부터 이 제도가 확대 시행되면서 만65세 이상 노인은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만 65세…

올 2019년은 1954년생들이 호적상 생일이면 만 65세가 되는 해이다.

그렇지만 2019년 새해에 들어서자마자 누릴 수 있는 혜택들이 제법 있었다.

관할 보건소에서는 54년생이면 생일 전이라도 폐렴구균 무료예방접종이 가능하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8년 째 운동하고 있는 서초구립 언남문화체육센터에서는 지난 2월에 연회원 갱신 등록 시 회비를 50%나 할인해 주었다.

그리고 지난 봄 친구들과 속리산 법주사에 갔을 때도 1954년, 甲午生이기만 해도 입장료가 면제였다.

하지만 그때는 기분만 좀 좋았을 뿐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

열흘 전쯤일까? 

주민센터에서 보낸 우편물 하나가 집으로 배달되어 왔다.

수신인에는 내 이름이 적혀있었다.

'동사무소에서 왜…?'

궁금해하면서 봉투를 뜯었다.

'찾아가는 복지플래너 서비스 안내문'이라는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만 65세, 70세 도래 어르신의 자택으로 주민센터의 공무원과 간호사가 함께 방문해 기초연금  신청 등 각종 상담과 건강체크를 해드리는 복지제도가 있다면서 우리 집을 방문할 예정이란다. 그러곤 방문 희망 일시를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우리나라 참 많이 좋아졌다 싶었다. 한편 '내가 벌써 이런 대접 받을 나이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참 묘했다.

전화 후 주민센터로 찾아갔더니 담당자는 현재의 소득 등을 묻고는 양식 한 장을 내주면서 작성하란다.

양식의 빈 칸을 다 채워 제출하자 담당자는 잠시 후 신용카드를 닮은 카드 한 장을 내주면서 말했다.

"어르신, 지하철만 무료예요. 사전발급이라 아직은 안되고 주민등록상 생일날부터 쓰시면 됩니다."

바로 '서울특별시 어르신 교통카드'였다.


내가 지공선사 된 오늘.

게다가 오늘은 45년이나 묵은 친구들인 입행동기들의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일주일 동안 서랍 속에서 잠만 자던 카드가 빛을 발하는 날,  카드를 챙겨들고 집을 나섰다.

양재역에서 3호선으로 환승할 작정으로 신분당선을 타기 위해 양재시민의숲역으로 가서는 출입구에서 카드를 태그했다.

그런데 "삑∼" 소리가 났을 뿐 다른 멘트는 없었다. 몇 해 전 7년 선배 한 분이 지하철을 타거나 내리면서 어르신 교통카드를 지하철역 단말기에 갖다댈 때마다 무임승차(?)임을 알리는 멘트가 나오는 통에 창피해서 지하철을 못 타겠다고 하길래, '늙어 가는 게 그렇게 부끄러운 것일까?' 싶어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소리가 바뀐 걸보면 이런 불만 많았나 보다. 

나는 지하철을 많이 타지 않는 편이다.

많이 타야 한 달에 열 번이나 탈까 싶다.

詩, 수필, 색소폰 등을 공부하느라 내가 자주 드나드는 곳은 모두가 양재역 부근에 있어 버스를 이용하거나 아니면 도보로 이동한다. 하지만 오늘처럼 시내 쪽에서의 모임에 참석하거나 또는 관악산,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등 외곽에 위치한 산으로 등산 갈 때 등 한 달에 네댓 번 정도는 신분당선 지하철로 양재역 또는 강남역에 가서 다른 지하철로 환승한다. 그래서 내가 가장 많이 이용하는 노선은 시민의숲역 ↔ 양재역, 아니면 시민의숲 ↔ 강남역이다. 그런데 나는 이 구간을 이용할 때마다 불만이었다. 민간자본이 건설하고 운영한다는 이유로 다른 지하철과는 달리 한 구역만을 타고도 1,200원∼1,300원의 일반 지하철요금에 추가요금으로 꼭 1,000원씩을 더 내야 했기에 언짢았었는데, 오늘은 공짜라서 기분이 좋았다.

하기야…

공짜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나뿐일까.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

'공술 한 잔 보고 십 리 간다.'

'공짜라면 당나귀도 잡아 먹는다.'

옛부터 이런 속담들이 전해 내려오는 걸 보면 공짜 좋아하는 건 어쩌면 인간의 본성일지 모른다.


종각역에 내려 모임장소인 막내횟집에 들어갔다.

열네뎃 명의 친구들과 함께 갓 지난 추석명절 덕담 등 추억을 나누면서 술잔을 돌렸다.

싱싱한 회가 잔뜩 담겼던 접시가 거의 바닥을 다 드러내고 술잔도 몇 순배나 돌았을 무렵.

내가 일어나 어르신 교통카드를 꺼내 보이며 오늘부로 지공선사가 되었음을 자랑하고는 건배 제의를 자청했다.

"지공선사 화이팅!!"

"지공선사 화이팅!!!"

··················


몇 달 전, 신문에서 지하철 무임승차에 따른 세대간의 갈등을 읽었던 적이 있다.

해마다 서울지하철의 적자가 수천 억원씩인데 적자의 원흉이 노인들의 무임승차라는 통계.

노인들이 할 일 없이 지하철 무임승차로 춘천에 가고, 온양에 다니는 탓에 빈 자리가 없다는 젊은 세대의 불만.

젊은이 뿐 아니라 중장년층까지 지금의 지하철 무임승차 나이를 65세에서 70세로 늦추어야 한다는 다수의 의견.

그리고 젊은 세대의 불만 섞인 의견에 대한 노인들의 항변 등등.

그런데 어쩌랴.

나도 오늘부터 혜택을 누리고 있으니…

아무리 둘러보아도 국가발전을 위해 치른 내 희생은 보이지 않는데…


미안하고 고맙다.

대신··· 

나는 마음먹었다.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지하철을 타지 않기로…

지하철에서 젊은이들이 눈살 찌푸릴 언행은 절대 하지 않기로…

많이 걷고 건강관리도 열심히 해서 건강보험이라도 덜 축내야 겠다고…

각종 세금을 제대로 잘 내서 나라의 곡간 채우는데 조금이라도 도움 되는 국민 되겠다고…

무임승차로 인해 생긴 적자는 결국 나라의 금고를 열어 보전할 수밖에 없을 테니 혜택 이상의 기여는 꼭 하리라고 …


고요할 선(禪), 스승 사(師)

禪師는 높은 도를 쌓은 승려를 높여 일컫는 말이란다.

멋진 한자어가 부끄럽지 않은 선사가 되도록 애써야 겠다.


'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화문 집회에 가다.  (0) 2019.10.05
주민을 찾아온 보건소  (0) 2019.10.04
여주 썬밸리의 가을맞이  (0) 2019.09.05
매미의 허물에서 느끼다  (0) 2019.09.02
합동 야유회  (0) 2019.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