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2. 21.(수요일)
을지로 4가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최근 내가 블로그에 「멋진 선배님」으로 소개를 했지만, 지난 봄부터 내 블로그를 자주 찾아와 격려의 댓글을 남겨주시더니 한 달여 전에는 자신의 블로그에 「그의 블로그」란 제목으로 내 삶의 이야기를 글로 쓰신 안무길 선배께서 자신의 고교 후배이자 나의 入行同期인 김진배 前지점장과 나를 점심에 초대했던 것이다.
꼬리찜에 반주를 곁들인 점심을 맛나게 먹으면서 수십 년 전 같이 근무하던 때의 은행이야기랑 근황을 한창 나누고 있는데 내 핸드폰이 울리고 화면엔 "내 딸 보라"란 문자가 떴다.
"아빠, 어디야?"
"을지로에서 점심 먹고 있는데, 왜?"
"어린집에서 전화가 왔는데, 은규가 열이 많이 난다고 데려가라고 전화했네. 맛있게 드세요. 엄마한테 연락할 게."
전화를 끊고 다시 점심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지만 집중할 수 없었다.
'은규가 열이나다니…'
'어젯밤에만 해도 거실이 좁은듯 뛰고 놀았는데…'
'오늘 저녁엔 어린이집에서 송년 재롱잔치를 한다기에 온식구들이 다 가기로 했는데…'
잠시 후 보라가 다시 전화를 했다.
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아 중곡동에 있는 시댁에 연락했더니 시아버님께서 데리려 가겠다고 하셨다면서 걱정하지 말란다.
사돈께서 데리러 가실 시간이 된다니 참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이내 '은규를 소아과에 데려가고 또 양재동의 은규 집에서 멀리 떨어진 중곡동에 데리고 있자면 은규는 물론 은규 엄마 아빠의 불편함이 많을 텐데…, 은규가 단골로 가는 소아과에 가는 게 더 좋을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늘 돌보는 우리가 데리고 있는 게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내가 집사람에게 전화를 해도 신호는 가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정토회의 수요법회는 끝났을 시간인데 전화를 안 받는 걸 보면 아마 핸드폰을 진동으로 해놓고는 점심을 먹는 모양이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선배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서둘러 점심을 끝냈다.
딸한테 내가 어린이집으로 가겠다고 전화를 했다.
집에가서 차를 몰고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리기에 택시를 탔다.
을지로 4가에서 용산.
1시 30분에 어린이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실내에는 불이 다 끄지고 어둑어둑했다.
아이들의 낮잠시간이었다. 1시부터 시작되는 낮잠시간이니 아이들은 모두 공부방에서 한잠을 자고 있는 시간.
그런데 공동 놀이공간의 구석 한 켠에 놓인 조그만 침대에 우리 은규가 혼자 엎드려 자고 있는 게 아닌가.
친구들이 공부방에서 나란히 누워 자고 있을 시간에 우리 은규는 다른 곳에서 혼자서….
갑자기 고열이 났으니 혹시 독감이 아닐까 싶어 격리시켰을 선생님의 조치를 내 머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돌보는 이 없이 버려진듯 혼자 축 처져 누워 있는 손자를 보는 순간 내 마음은 서운하면서 짠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선생님이 나와 이야기를 했다.
은규가 등원했을 때부터 미열이 있었단다. 오전 산책을 다녀오고 나서는 콧물을 많이 흘리면서 열이 높아졌단다. 38.8도까지 올랐단다. 점심을 먹을 때는 한 숟가락도 못 먹고 처져 쓰러지더란다. 옷을 벗기고 물수건으로 닦아 열을 좀 떨어뜨렸다는데도 여전히 몸이 뜨거웠다.
가방을 챙긴 다음 은규를 안고 나와 택시를 탔다.
차 안에서 집사람에게 전화를 했더니 마침 전화를 받았다. 소아과에서 오래 기다리지 않도록 먼저 소아과에 가서 순번표에 이름을 적어라 당부를 하고는 은규와 나는 바로 소아과로 향했지만, 마음은 급해 죽겠는데 차들은 왜 그리 많은지….
평소 때보다 도로는 더 막혔다. 평소에는 30분이면 되는데 한 시간이나 걸려 소아과에 도착했다.
소아과에서 체온을 재는데 39.2도 되었다.
의사는 편도선이 많이 부었단다. 의사가 독감을 의심하면서 고열이 시작된 시간을 물었을 때 오전 10시쯤부터라고 하자 독감여부를 정확히 판단하려면 발열 후 8시간은 넘어야 된다며 오늘은 감기약과 해열제로 열을 다스리고 내일 아침에 독감검사를 해보잔다.
처방약을 받아 집에 오자 논현동 사모님이 전화를 했다.
꽃시장에 왔던 길이라면서 우리 집에 오시는 중이라더니 이내 주차장에 도착하셨다.
보라가 아래층으로 이사왔다니 보라집도 한번 보고 싶고, 같이 맛있는 저녁을 먹고 싶어 오셨다면서 크리스마스꽃 포인세티아 화분을 사오셨다. 90을 넘으신 연세임에도 때마다 나와 내 가족을 챙기시는 사모님이 너무 고마웠다.
오늘은 내가 맛난 저녁을 모시겠노라 말했지만,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야단만 맞고….
이때 보라가 전화를 했다.
은규가 소아과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은 보라는 은규의 열이 새벽부터 시작되었다면서 독감검사를 받기를 원했다.
소아과에 전화를 하자 빨리 오란다.
집사람이 은규를 데리고 소아과로 가고, 나는 사모님과 저녁식사를 가기로 하고는 집사람이 은규에게 옷을 입히려 했다. 그렇지만 은규는 할머니 손을 뿌리치고 한사코 할아버지랑 병원에 가겠다며 보채고 있으니….
하지만 사모님도 내 무릎에서 떠나지 않고 내 품에만 파고드는 은규가 안쓰러운지 나더러 소아과에 데려가라고 하셨다.
한참 동안 은규를 귀여워하시던 사모님은 그냥 돌아가실 수밖에 없었다.
다음을 약속했지만 너무 죄송했다.
독감검사.
코 속 깊숙이 면봉 같은 것을 넣어 시료를 묻혀 검사를 한단다.
그런데도 은규는 눈물만 글썽일 뿐 울지 않고 잘 참았다.
10분 후, 독감 양성 판정이 나왔다.
타미플루 처방.
다행히 독감은 타미플루만 제때 먹으면 쉽게 잡힌단다.
하지만 은규를 목요일, 금요일은 어린이집에 안 보내기로 했다.
신나는 날이다. 나도, 은규도.
이 이틀 동안 운동이랑 색소폰 연습 등 모두를 쉬고, 은규와 나는 하루 종일 친구가 되는 날이다.
그렇지만 손주들의 건강이 내 행복이 아닌가.
종일 은규의 친구가 되는 것도 좋지만, 우리 은규가 빨리 나으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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