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9. 27.(화요일)
오늘 저녁식탁에 호박잎이 올라왔다.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지, 늦은 봄부터 식탁에 오르기 시작하는 호박잎쌈은 내가 무척 좋아하는 음식.
살짝 찐 연한 호박잎을 펴서 왼 손바닥에 올린 다음 밥에다 버섯과 청양고추, 호박잎 줄기 등 건더기를 많이 넣어 되직하게 끓인 강된장을 얹어 싸 먹는 호박잎 쌈밥이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 아마도 나 같은 시골 출신의 사람들이라면 여름날의 별미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지금은 추석까지 지난 가을이라 오박잎이 너무 억세고 질겨서 올해는 이제 먹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런데 요 며칠 동안 우리 부부가 운동하는 언남문화체육센터 출입구 앞에서 한 할머니가 청계산 아래에 있는 새쟁이 마을에서 유기농으로 직접 농사지은 것이라며 열무, 늙은 호박, 그리고 호박잎 등 몇 가지 야채를 몇 장의 신문지 위에 올려놓은 채 팔고 있더니, 집사람이 아침 운동을 마치고 오는 길에 호박잎을 사왔던 모양이다.
그런데…
가을 호박잎은 먹기도 전에 향수(響愁)와 어머니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한여름날의 내 고향 마을 담장들은 호박덩굴을 잔뜩 이고 지냈다.
겨울이 지나 햇살 좋은 봄날이 되면 내 어머니는 호미를 들고 돌담 아래 여기저기 구덩이를 파곤 했다. 구덩이마다 호박씨 몇 개씩을 묻고는 기다란 나뭇가지 한두 개를 꽂아 돌담에 걸쳐놓았다. 또 닭들이 파헤치지 못하도록 구덩이 위에는 가시가 많이 달린 탱자나무 가지도 올려 놓았다. 한 주일 정도가 지나 파란 새싹들이 땅을 뚫고 나오면 어머니는 수시로 물을 주고, 가끔은 아궁이에서 재를 긁어내 덮곤 했다. 새싹들은 죽순처럼 하루가 다르게 잘 자랐다. 꽂아 놓은 막대기를 따라 기어오르기 시작하면 오래지 않아 무성한 덩굴이 되어 돌담을 덮곤 했다.
돌담 위를 기어 다니는 호박줄는 어머니께 많은 것을 내주었다. 여름 한철에는 다른 반찬이 필요 없을 만큼 호박잎쌈을 좋아하시는 아버지가 드시도록 시도 때도 없이 보드라운 잎을 내주고, 오일장에서 은빛갈치를 사오시는 날에는 문질러 비늘을 벗겨낼 수 있도록 억센 잎을 내주었다. 된장찌개나 갈치조림을 보글보글 끓일 때 뿐 아니라 날씨가 제법 서늘한 가을까지 어머니는 밥을 짓다가도 얼른 돌담으로 가서 호박을 따다 맛난 반찬을 만들어 상에 올리곤 했다. 무성한 잎사귀 뒤에 숨었다가 누렇게 늙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늦가을의 호박은 호박전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호박죽의 모습으로 우리 식구들의 입을 즐겁게 했다.
돌담 위의 호박줄기는 어렸던 내게도 많은 재미를 선물했다. 친구들가 어울려 골목길을 걸으면서 막대기를 칼처럼 휘둘러 줄기와 호박잎을 자르기도 하고, 심심할 때는 이 골목 저 골목을 다니며 눈에 띄는 돌담 위의 호박을 쓸데없이 꼬챙이로 푹푹 찌르곤 했으니 그 시절의 호박은 심심풀이 장난감이었던 셈이다. 또, 활짝 핀 호박꽃 속으로 들어가는 꿀벌을 보면 여지없이 호박꽃의 윗부분을 움켜잡은 후 꺾어서는 빙글빙글 돌리며 놀기도 한데다 한겨울밤의 볶은 호박씨는 누이들과 함께 까먹는 맛난 간식거리였으니….
어디 그뿐이랴.
두 해 전까지는 사시사철 받았던 어머니의 택배 상자에서 빠지지 않았던 호박.
봄의 시작과 함께 배달되는 상자엔 정구지, 상추, 미나리 같은 푸성귀들이 들어있고, 여름이 시작도 되기 전에 도착하는 택배 상자엔 언제나 가지와 풋고추를 비롯해 두릅, 제피 이파리와 함께 애호박 몇 개랑 호박잎들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또 가을이 깊어질 무렵에 홍시와 함께 배달되는 상자를 열면 항상 비닐로 꼭꼭 싸맨 참기름 병과 들기름 병이 먼저 보이고, 깻잎, 콩잎, 고구마, 대추, 밤 등등 봉지 봉지 담긴 갖가지 야채와 과일들 밑에는 누렇게 익은 늙은 호박들이 못습을 드러내곤 했었는데.
그렇지만 고향도 이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곳이 되고 말았으니.…
볼때기가 터질 만큼 큼직한 호박잎쌈을 입에 넣었다.
가을 호박잎이 초여름의 잎만큼은 부드럽지 않지만 여름철 못잖은 별미였다.
고향 생각, 어머니 생각이 맛을 더했던 모양이다.
내게 호박은 어머니의 사랑이자 따스한 고향의 얼굴인 것 같다.
참, 올 추석날에 형님이 고향에서 따온 것이라며 늙은 호박을 몇 개나 주셨지….
고향의 누런 호박으로 호박전을 굽고 호박죽을 쑤면 좋겠다.
손주들에게 호박전이랑 호박죽을 먹이며 왕할머니의 사랑을 들려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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