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7. 9.(토요일)
나의 지금과 같은 생활이 벌써 2년.
아니다.
만 55세가 되어 은행 규정에 따라 지점장 자리에서 물러날 때, 명예퇴직 또는 임금피크제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서 명퇴 대신 임금피크를 택했지만 임금피크의 자문역은 시간적 여유가 많았던 덕분으로 정년퇴임 전부터 색소폰을 배우고, 연필로 그리는 인물화를 배우고, 요리학원에 다니면서 첫 외손자 원준이를 보러 다녔으니 이 기간까지 포함하면 족히 7년이 넘는다.
7년.
이 7년은 우리 가족에게 많은 일들이 일어난 세월이기도 하다.
2010년 1월엔 나의 첫 외손자인 원준이가 태어나고, 같은 해 4월엔 딸 보라가 결혼을 했으나, 다음해 2011년 크리스마스 날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2013년 9월엔 두 번째 외손자 은규가 태어나고, 내가 2014년 10월 1일부터 10월 10일까지 열흘 간을 나의 정년퇴임과 회갑을 자축하는 의미로 서울에서 고향, 청도까지 천 리 길을 걸어가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으며, 2015년 2월 14일에는 세 번째의 외손주이자 첫외손녀인 세은이가 태어났지만 , 세은이가 태어난 지 한 달도 안되는 3월 10일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으니·····.
인간사(人間事)는 새옹지마(塞翁之馬)라더니
내게도 큰 기쁨 뒤엔 큰 슬픔이 따르고, 큰 슬픔 뒤엔 꼭 큰 기쁨이 따른 걸 보면
'인간사는 새옹지마'란 옛말이 틀리지 않는 모양이다.
기쁨과 슬픔이 반복되는 인생.
내가 현직에 있을 땐 친척이나 지인들은 나를 만나면 그들은 내게 "자네 얼굴이 많이 상했네",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무슨 일이 있냐?"는 말을 많이 하곤 했다. 그런데 요즘은 주위로부터 "아주 편해 보인다", "좋은 일 이 있는 모양이네, 얼굴이 조흔 걸 보니…" 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듣기에 참 좋다..
하긴, 은행에서 지점장으로 근무하던 10여 년 동안은 내내 영업실적, 고객관리, 직원관리 등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역류성 식도염과 신경성 위염을 달고 살았지만, 별달리 걱정거리가 없는 지금에야 얼굴 붉힐 일도, 짜증낼 일도 없으니 편한 모습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의 겉모습까지 바뀌게 한 게 무었일까?'하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7년째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내 일상에서의 행복이 무엇인지 하나씩 더듬어 보게 했다.
아침 6시가 되면 나는 집사람과 함께 집앞 공원에 있는 스포츠센터로 운동을 간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2,3시간 동안 운동을 하다 보면 운동복이 땀에 흠뻑 젖지만, 온몸에서 땀이 솟아오를 때는 몸속 구석구석에 쌓였던 온갖 찌꺼기가 다 빠져나오는 듯하다. 운동 후 따뜻한 물과 차가운 물을 번갈아 뒤집어 쓰고 나면 얼마나 뿌듯하고 상쾌한지 모른다. 흘리는 땀의 양과 비례해서 찾아오는 뿌듯함과 상쾌함은 내가 하루 중에 가장 먼저 맞이하는 행복이다.
10시를 전후해 빵과 과일, 계란 등 집사람이 정성깟 차린 건강식으로 요기를 하고는 마치 출근이라도 하듯 양재역에 있는 색소폰 동호회로 향한다. 노래는 물론 악기, 아니 나는 음악 자체에 완전 잼뱅이여서 시작한 지 3년이 넘었으면서도 갓 1년밖에 안된 회원들보다 못한 실력이지만 색소폰을 불고 또 분다. 한참 불다 힘이 들면 연습방을 나와 회원들과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 다시 들어가 불고, 다시 불다 밥때가 되면 회원들과 어울려 점심을 먹고…. 식사 후 한두 시간을 더 불다 보면 어느덧 오후 3시. 나는 악기를 접는다.
그렇지만 쌓인 지 60년이나 되어 콘크리트보다 더 단단해진 음악과의 담을 허물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멋모르고 시작을 했었기에 아직도 음악은 내게 제일 어려운 종목임을 실감하곤 한다. 괜한 짓을 했다는 후회를 할 때도 있었고, 때려치우고 싶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금도 어렵기는 매한가지지만 한껏 색소폰을 불다 보면 더부룩하던 속이 시원해지고 즐거워진다. 악보와 소리에 집중해 불다 보면 잡념이 사라지고 머릿속마저 말끔해진다. 도레미파… 손가락으로 음계를 하나씩 짚어가며 보곤 했던 악보가 한눈에 들어오기도 하고, 불고 또 불다 보면 가끔은 제법 연주처럼 들릴 때도 있으니 이런 재미를 어디서 느낄 수 있으랴. 이런 쏠쏠한 재미가 쌓이고 연주할 수 있는 노래가 한 곡씩 한 곡씩 늘어날 때마다 즐거움은 배가된다. 게다가 양재천에서 열리는 우리 동호회의 야외행사 무대에서 한두 곡을 연주하고 난 뒤의 성취감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이런 즐거움과 성취감에 나는 큰 행복을 느낀다.
오후 4시쯤 집에 돌아오면 나는 냉장고부터 뒤진다.
이때부터 내 마음은 설레기 시작한다.
'오늘은 뭘 가져갈까?'
냉장고에 들어 있는 몇 가지의 과일을 꺼내 씻어 조그맣게 잘라 포크와 함께 통에 담는다.
또 아이들 몸에 좋은 마실거리도 챙겨서 출입증 카드, 차 열쇠와 함께 과일통을 들고 집을 나선다.
경부고속도로와 용산 가족공원 앞길을 달려 도착하는 용산 LGU+ 본사.
네 살짜리 은규가 다니는 직장 어린이집이 있는 곳이다.
출근하는 아빠와 함께 등원했던 은규가 환히 웃으며 달려와 내 품에 안긴다.
동작대교를 건너 다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돌아오는 은규의 하원길.
은규는 내가 준비해 간 과일을 맛나게 먹으면서 재잘재잘 이야기를 꺼낸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할 때도 있지만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어휘력과 표현력이 놀라울 때가 많다. 때로는 어디서 이런 말을 배웠나 싶어 깜짝 놀랄 때도 있다. 은규와 함께 CD에서 흘러나오는 동요를 따라 부르고, 구구단을 같이 하다 보면 차는 어느새 집앞에 도착한다.
만나러 가는 40분 동안의 설레임, 함께 돌아오는 40여 분의 즐거움은 오롯이 나의 행복이 된다.
이 행복은 지금은 7살이 되어 다른 이의 도움이 별로 필요 없는 원준이지만, 원준이가 지금의 은규 나이일 때 세발자전거를 밀며 원준이를 데리러 다니면서 느꼈던 설레임, 원준이의 하원길에는 놀이터에서 나도 같이 어린이가 되어 놀면서 느꼈던 행복과 같은 설레임이고 행복이다.
6시경 집에 도착하면 나는 은규의 친구가 된다.
내가 대장이 되기도 하고, 은규가 대장이 되기도 하고…
은규가 만화영화에 나오는 카봇이 되면 나는 괴물이 되어 함께 뒹굴곤 한다..
외손주를 위해 정성을 쏟은 집사람의 저녁상이 다 차려지면 한 숟가락 한 숟가락 손자의의 입에 밥이 들어갈 때마다 내 배가 저절로 불러오는 시간이다. 집사람은 식사 후에도 카봇 등 만화영화를 더 보고 싶어하는 은규를 달래어 몸을 씻기고 잠옷을 입힌다.
벌써 8시가 훌쩍 넘었다.
다시 내가 나설 시간이다.
아기띠를 허리에 두른 다음 은규를 품에 안고 어깨끈을 조이고는 집을 나선다.
세상의 어떤 향수보다 향기로운 손주의 살내음을 맡으며 공원을 돌면서 덕담을 들려주고 자장가를 부른다..
"우리 은규는 지혜롭고 자비로우며, 건강하고 긍정인 행복한 아이입니다."
원준이에서 은규로 이름만 바꾼 채 7년 동안 들려주는 덕담과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내가 아는 유일한 자장가를 부르다 보면,
어느새 은규도 이종사촌 형아 원준이가 그랬던 것처럼 공원을 한 바퀴를 채 돌기도 전에 잠이 든다.
은규를 침대에 눕히고는 나도 그 옆에 나란히 누워 손자의 손을 잡는다.
비단보다 더 보들보들한 은규의 손을 잡고 있노라면 하루의 피로는 눈 녹듯 사라지고 내게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된다. 퇴근길에 들러 잠든 은규를 안고 가는 딸과 사위의 가벼운 발걸음은 나를 또 행복하게 한다.
은규가 돌아가고 난 뒤의 허전함을 빗자루질과 걸레질로 달랜다.
그러고는 나는 책상앞에 앉는다.
하루의 흔적을 블로그에 남기거나 글을 쓰다 보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다.
그러나 이때 맞는 하루 중 마지막 행복은 내게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만든다
내가 꿈 꾸었던 행복.
내일이면 다시 맞을 일상(日常)
다림쥐 쳇바퀴 돌아가듯 반복되는 날들이지민 젊은 날에는 느낄 수 없었던 행복이 담긴 일상이다.
봄에 새쌋을 틔운 나무도 가뭄과 폭염, 태풍을 견뎌내고 가을이 되어야 나뭇가지에 과실이 탐스럽게 영글어가듯 인생에서는 나이가 가을쯤이 되어야 일상에서도 행복의 꽃이 피는 모양이다.
나는 가을에 들어선 내가 참 좋다.
'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 익어 가는 내 고향의 가을 (0) | 2016.09.12 |
---|---|
"한진해운" 사태를 보면서 (0) | 2016.09.10 |
가설극장의 추억 (0) | 2016.08.28 |
영화 '덕혜옹주'를 보고 (0) | 2016.08.25 |
반나절의 갈등 (0) | 2016.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