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는 이야기

가설극장의 추억

최근 잇달아 영화관에 갔다.

친구들과 '인천상륙작전'을 보고, 아내와는 '덕혜옹주'를 보았다.

인천상륙작전을 관람한 청당CGV은 시설이 호텔급인데다 예약한 좌석에 큼직한 팝콘통이랑 생수까지 준비해 둘 만큼 대접이 좋았고, 덕혜옹주를 본 대한극장도 CGV만큼은 아니었지만 상영관이나 편의시설이 꽤나 좋았다.

편안한 의자에 앉아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리는데…, 안락함 때문일까?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슬슬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어느새 내 영혼은 타임머신에 올랐다.

 

시간은 1960년대.

장소는 내고향, 경북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 명대.

일 년에 몇 번씩 양 옆에는 요란한 포스터를 달고, 길이가 3,4미터는 넘을 듯한 기둥처럼 생긴 나무들을 잔뜩 실은 트럭이 내 고향에 오곤 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장터 한 곳에 나무들을 내려 놓고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군데군데 구덩이를 파고 네모 형태로 기둥을 세우고 광목으로 만들어진 천막을 쳤다. 그들이 기둥을 세우고 천막을 치는 동안 포스트를 양쪽에 단 트럭은 확성기를 운전석 지붕 위에 설치하고는 우리 동네는 말할 것도 없고 이웃 마을의 골목골목을 누비며 방송을 해댔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시는 ○○동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저녁부터 명대 장터에서 상영해 올리는 영화는 눈물 없이는 감상할 수 없는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해가 서산을 넘어가고, 저녁식사 때가 지나면 사람들이 하나둘 천막 앞으로 모여들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물론 5리 길도 넘는 이웃 마을 어르신들도 오시고, 이웃 동네 처녀 총각들도 모여들어 입장권을 사고는 길다란 나무로 통로처럼 만든 개찰구를 통해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담처럼 옆만 막았을 뿐 하늘이 뻥 뚫린 천막 안의 땅바닥엔 넓다란 멍석들만 깔려 있었다. 멍석에 앉아 보는 영화. 뒷쪽에서는 필름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스크린엔 빗물이 내리듯 하얀 빛줄기가 줄줄 흐르고, 가끔씩 영사기 앞으로 다니는 사람의 그림자가 스크린에 비치면 뒤쪽에서 앉아라고 소리치며 보는 영화지만, TV는 고사하고 라디오도 드물고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았던 시절이라 일 년에 한두 번 보는 영화는 엄청 큰 즐거움이고 행복이었다.

천막 밖에서 발동기가 달달달 소리내며 돌아가면 대한뉴스에 이어 영화는 시작되었다.

이런 날이면 나와 친구들도 횡재하는 날이었다.

가설극장에 들어갈 돈이 있을 턱이 없는 우리에겐 비장의 방법이 있었다.

영화가 시작되면 낮에 미리 봐 두었던 쪽의 천막을 살짝 들어올리고 기어서 몰래 들어가는 것이었다.

몰래 들어가다 들키면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이 나지만, 성공률이 실패률보다 훨씬 높은데다 영화가 시작되어 천막 안이 컴컴하기 때문에 사람들 속에 섞여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초등 5학년 때가 아니면 6학년 때였다.

5,6학년 모두 담임은 故 이창기 선생님이셨으니 헷갈린다.

가설극장이 들어와 며칠 동안 상영하던 어느 날이었다.

하루는 등교를 하자 담임 선생님께서 화난 목소리를 냈다.

"어젯밤 몰래 영화 보러 간 놈들 앞으로 나와." 

엉거주춤하던 친구들

한 명이 나가자 줄줄이 교단 앞으로 나갔다.

나도 나갔다.

모두 예닐곱 명이었다.

모두가 천막을 들치고 몰래 들어갔던 동네 친구들이었다.

이웃에 사시는 집안의 어른이자, 친구의 아버지로 우리를 무척 사랑하셨던, 또 평소엔 매우 젊잖으신 선생님이셨지만  이날은 무척 화를 내셨다. 가설극장에 몰래 들어가는 것은 도둑질 하는 것과 같다며 굵은 회초리를 들었다.

우리 엉덩이에 불이 났다.

속된 말로 뒤지도록 맞았다.

아마 열대도 넘게 맞았던 것 같다.

한 친구는 무슨 핑계를 대다가 몇 대 더 맞고

그래서일까?

나는 그때 본 영화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

영원히 잊지 못할 영화다.

 

집사람이 내 옆구리를 찔렀다.

눈을 뜨자 「덕혜옹주」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자꾸만 가설극장이 그리웠다. 

뻥 뚫린 하늘에서는 별들이 영화를 보고, 천막 안 멍석에서는 마실 나온 사람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아 모기에게 피를 빨리면서도 재미나게 영화를 보았던 그때가 그리웠다.

 

 

 

 

 

'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진해운" 사태를 보면서  (0) 2016.09.10
日常에서 누리는 나의 행복  (0) 2016.08.30
영화 '덕혜옹주'를 보고  (0) 2016.08.25
반나절의 갈등  (0) 2016.07.20
친구의 등단  (0) 2016.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