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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삼아 하는...

심산 김창숙 기념관

2013.9.12.은 木요일,

「연필로 그리는 인물화」 수업이 있는 날.

수업 교실이 있는 심산 문화센타에 일찍 도착했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 아직 제법 많은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막연히 독립운동가의 한 분으로만 알고 있었던 심산 김창숙 선생님.

어떤 분이셨는지 자세히 알고 싶어 기념관 주변과 전시관을 둘러 봤다.

 

▶ 心山 金昌淑생의 一生 ◀

유림(儒林)의 지도자였던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은 항일투쟁과 통일민족국가 건설이라는 민족적 대의에 일생을 바쳤다. 심산은 1879년 경북 성주에서 출생, 16세 때 부친으로부터 노예해방과 계급타파 등 진보적인 가르침을 통해 각성하기 시작했다. 1905년 스승 이승희를 따라 상경해 을사오적(乙巳五賊)의 목을 벨 것을 상소했으며 1908년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만들어 계급 혁파에 앞장섰다.

3.1운동 독립선언서에 유림대표가 빠졌음에 크게 실망한 선생은 전국 유림대표 137명이 서명한 '한국독립청원장서(韓國獨立請願長書)'를 갖고 중국 상해로 건너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했다. 1919년 4월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으로 활약했으며 1920년 귀국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다가 제1차 유림단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잡혀 투옥됐다가 풀려나 중국으로 다시 건너갔다.

1921년 단재(丹齋) 신채호와 함께 독립운동지(誌) 천고(天鼓)를 발행하고 백암(白岩) 박은식등과 사민일보(四民日報)를 발간하며 자주독립정신을 고취시키기에 힘쓰는 한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하여 군사 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며 중국의 손문(孫文)과 교섭해 광복운동자금 57만원을 제공받았다.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 당시 의열단원(義烈團員) 나석주 의사에게 무기와 자금을 주어 동양척식회사를 폭파케 했다. 또한 중국 정부의 풍옥상(馮玉祥)과 교섭해 만몽국경수원포두(滿蒙國境綏遠包頭) 지방의 100여만평을 빌려 독립군 양병에 힘쓰고 주만독립군군사고문(駐滿獨立軍軍事顧問)으로 활약하였다.

심산은 두 아들을 항일투쟁에 바쳤다. 북경에서 항일투쟁을 하던 큰아들 환기(煥基)씨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고문을 받던 끝에 1927년 옥사했으며, 둘째 아들 찬기(燦基)씨는 10여 년의 옥고를 치르는 등 고초를 겪다가 1945년 중경에서 숨져, 망명 동지들에 의해 유골로 돌아왔다.


큰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심산은 지병이 악화돼 상해 홍제의원(弘濟醫院)에 입원 중 일본 경찰에 붙잡혀 대구로 압송돼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 복역하면서 모진 고문으로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 1928년 옥중 투쟁하던 심산은 이렇게 말하며 무료변론을 거부했다.

"나는 대한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한다. 일본 법률논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대의에 모순되는 일이다.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결코 내 지조를 바꾸어 남에게 변호를 위탁하여 살기를 구하지 않는다"

 

이와 함께 1909년 일진회가 '한일합방론'을 주장하자 "이 역적들을 성토하지 않는 자 또한 역적이다"고 일갈했으며, 이승만 대통령이 최남선의 죽음에 보낸 조사(弔辭)에서 그를 칭찬하자 "진실로 올바른 세상을 만들려거든 우선 역적들을 주살(誅殺)하라"고 경무대에 경고했다.
심산은 1945년 건국동맹사건(建國同盟事件)으로 왜관경찰서에 구금된 상태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해 민중당 당수로 추대됐으나 정당 불참을 선언하며 거절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출됐다. 1946년 민주의원의원(民主議院議員)과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고 성균관(成均館)과 성균관대학을 세운 뒤 유도회 총본부 위원장과 성균관대학 초대학장을 지냈다.

심산은 백범 김구와 노선에 같이 했지만 이승만과는 대립의 길을 걸었다. 심산은 1946년 정부수립을 위한 28인 최고정무위원에 뽑혔으나 이 기구가 미 군정사령관 하지의 자문기관으로 전락하자 이승만과 대립하며 탈퇴했다. 1951년 1.4후퇴 부산 피난 시절, 이승만 대통령 하야경고사건(李承晩大統領下野警告事件)을 주도해 '인심 교란죄'로 40일간 부산 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그 뒤 1956년 이승만 대통령 3선 취임 반대 경고문을 발표했으며 1957년 자유당 정권에 결탁한 세력에 의해 성균관 유도회와 성균관대 총장에서 쫓겨나면서 친일세력에 의한 고초가 끊이지 않았다. 1958년에는 보안법개악 반대투쟁을 지도하고 1959년에는 반독재 민권쟁취구국운동을 지도하며 이승만 대통령에게 사퇴권고 서한을 보내는 등 꼿꼿한 선비정신을 잃지 않았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대표를 맡아 민족자주 통일운동에 앞장섰으며 또한, 김구 선생 살해 진상규명 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다가 이해 5월 18일 진보적 유학정신과 민족주의를 일치시킨 삶을 후세들에게 남긴 채 향년 8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전시관 관람을 마치고

시작한 두 번째 그림수업.

곧 추석 명절이 다가 온다며

모든 회원들에게 갖가지 송편이 담긴

떡을 한 팩씩 나누어 주었다.

맛난 송편을 씹으며 두 시간 내내

그린 그림은, 눈 네 개

진짜 눈처럼 그리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심산 김창숙 기년관의 이 곳, 저 곳)

 

(눈 그림의 교본과 선생님이 그린 눈 그림)

 

 (두 시간 동안 내가 그린 눈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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