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4. 28. 목요일
공원 벤치에 앉아 학교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2시 30분쯤 되었을까?, 은규가 두 팔을 벌린 채 뛰어와 나를 꼭 껴안았다.
책가방은 벗겨 내가 멘 뒤 은규 손을 꼭 잡은 채 점심 메뉴, 비비추와 옥잠화의 차이 등을 이야기하면서 공원을 걸었다.
"할머니!" 큰소리로 외치며 집에 들어서자마자 은규가 마스크를 벗어던지곤 노래와 춤으로 집사람의 혼을 쏙 빼고 있을 때 나는 혹시 숙제라도 있는지, 내일 챙겨갈 준비물은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싶어 은규의 책가방을 열고 '알림장' 노트를 읽은 후 '주제별 글쓰기'란 노트가 눈에 띄어 펼쳤더니 바로 전날 쓴 글이 있고 그 아래에는 담임선생님께서 남긴 메모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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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닮고 싶은 사람]
내가 닮고 싶은 사람은 우리 할아버지입니다.
할아버지는 가족이나 친구를 항상 아껴주십니다.
우리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주시고, 수학 같은 과목은 잘 가르쳐 주십니다. 그림도 잘 그리십니다. 할아버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십니다. 할아버지는 원준이 형, 나, 세은이가 태어났을 때 정말 기뻐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할아버지를 존경해요. 엄마, 아빠, 친척들처럼요. 할아버지가 없었으면 전 맨날 심심하고 지루한 날만 계속되었을 겁니다.
할아버지! 고마워요! 행복해요! 사랑해요!
(선생님의 메모)
할아버지께서 이 일기를 읽으시면 정말 기쁘시겠다!!
은규의 사랑이 묻어나는 감동적인 일기야♡
멋진 할아버지를 닮아가는 우리 은규는 점점 더 멋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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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은규가 글쓰기 숙제가 있다고 했다.
글쓰기의 주제가 '내가 닮고 싶은 사람'이라고 하길래 나는 "은규는 위인전이랑 한국사, 삼국지, 세계사 만화책을 많이 읽었으니까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안중근 의사 또는 에디슨, 아인슈타인 등 세계적인 발명가나 은규가 좋아하는 BTS 멤버들 중에서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을 골라 쓰면 되겠네···"라고 했었다.
그런데도 은규는 할아버지인 나를 닮고 싶다는 글을 썼다.
번듯하게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나를 닮고 싶단다.
갑자기 뭉게구름 한아름을 안은 기분이었다.
지난 주말 강원도 횡성에 다녀오던 날이 떠올랐다.
내가 운전을 하고 내 옆자리엔 집사람, 뒷좌석에는 은규와 세은이가 앉아 있었다.
제2 영동고속도로를 한창 달리고 있을 때였다. 차 안에서 핸드폰을 너무 많이 본다 싶어 집사람이 은규에게 몇 차례나 폰을 돌려달라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집사람이 언성을 높여 잔소리(?)를 해대자 은규는 토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좀 닮으세요."
"···············"
은규가 살며시 앞자리로 손을 내밀어 할머니 손을 꼭 잡았다.
집에 도착해 내가 은규에게 물었다.
"은규야, 할머니에게 할아버지 좀 닮으라고 하던데 뭘 닮으면 좋겠어?"
"할아버지는 제 말을 다 들어주고 항상 느긋하신데 할머니는 급해서 내 말을 잘 끊고, 같은 말을 너무 많이 해요."
일주일에 3∽4일은 싱글 침대에서 나와 함께 자는 은규.
오늘은 저녁을 먹은 다음 오목 몇 판을 둔 후 샤워를 마친 은규와 나란히 침대에 누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은규야! 왜, 할아버지를 닮고 싶다는 글을 썼어?"
"할아버지를 존경하니까요?"
"할머니는?"
"할머니도 존경해요."
"그럼, 은규가 생각하는 할머니의 좋은 점이랑 할아버지의 안 좋은 점은 뭐야?"
"할머니는 발랄하고 웃음이 많아요.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잘하고 잘 어울리는데, 할아버지는 손자와 가족이나 아는 사람들과는 잘 웃고 재미있게 지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완전 '허리케인'이에요?"
"허리케인이라니 왜?"
"쌩쌩 비바람이 불고 썰렁하잖아요."
"은규 말 듣고 보니 그러네. 그럼 이제 내가 할머니를 좀 닮아야겠다."
"좋아요. 할아버지도 할머니처럼 많이 웃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렸으면 좋겠어요."
세월은 정말 빨랐다.
어두워지면 어깨띠로 가슴에 꼭 품은 채 집 앞 공원의 산책로를 거닐면서 "우리 은규는 지혜롭고 자비로우며 건강하고 긍정적인 행복한 아기입니다."라고 수십 번씩 속삭이며 토닥거리던 때가 며칠 전이었던 것 같은데···, 아빠 직장에 있는 어린이집에 다닐 때 날마다 용산까지 데리러 다니던 때가 그저께 같은데···,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수영장 데리고 가기 바빴던 때가, 초등학교 입학하던 때가 바로 어제처럼 느껴지는데 벌써 이렇게 컸나 싶었다. 초등 3학년이지만 대화의 상대로 충분한 은규가 너무 대견스러웠다.
원준, 은규, 세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은 요즘이 내 70 인생의 황금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