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4. 10. 일요일
집사람이랑 벚꽃 만개한 양재천이나 걸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발바닥이 근질근질하기 시작했다.
겨우내 양말 속에 갇혀 지내느라 답답해 죽는 줄 알았는데 오늘처럼 화창한 봄날에조차 가둬 두면 어떡하느냐고···, 오늘 같이 좋은 날씨엔 자기들도 흙냄새 맡으면서 진달래 등 봄꽃들을 보고 싶다 아우성치듯 발가락과 발바닥이 근질거렸다. 흙길이나 걸을 요량으로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집사람이 타 준 커피 한 통과 생수만을 챙겨 배낭을 메고 집을 나와서는 분식집에 들러 김밥 한 줄을 사서 배낭에 넣곤 청계산 옛골행 버스를 탔다.
청계산!
보기만 해도 반가운 산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엄해 야외 운동으로 건강관리를 했던 재작년과 작년엔 한 달에 적어도 한두 번씩은 꼭 찾았던 친구였다. 하지만 지난 12월부터 다시 헬스장에서 운동하느라 집사람과 함께 걷는 서울 둘레길을 제외하곤 등산 자체를 못했으니 근 반년만의 만남인 셈이다. 산에 들어서자 눈길 닿는 곳마다 진달래가 활짝 웃으며 반겼다.
진달래의 분홍 미소 덕분일까? 흙이 맨발에 전해주는 봄기운 덕분일까?
표현하기 어려운 느낌이 온몸에 퍼지면서 젊어지는 기분이 들고 러닝머신 위에선 무겁기 일쑤던 걸음마저 가벼웠다.
등산로 곳곳에 매복해 있던 밤송이들은 맨발을 시샘하는지 철 지난 가시로 내 발바닥을 수시로 찔러대며 훼방을 놓았지만 발가락과 발바닥이 즐기는 행복을 줄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문득 세은이와 은규의 귀여운 모습이 떠오르면서 웃음이 돋았다.
그저께 금요일 오후였다. 시야가 환해질 만큼 만발한 벚꽃도 즐길 겸 은규와 세은이를 데리고 양재천과 여의천의 거쳐 양재 시민의 숲에 갔다. 시민의 숲을 한 바퀴 돌던 중 여러 운동기구들이 있는 곳이 보이자 세은이와 은규는 그곳으로 달려가 철봉에 몇 차례 매달린 다음 벤치 프레스가 있는 곳으로 가서는 양쪽에 한 명씩 붙어 힘을 다해 낑낑대며 역기를 들어 보지만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가가 보았더니 한쪽이 20kg씩의 중량이라 바까지 합치면 50kg도 넘을 듯했지만 내가 평소 하는 중량보다는 훨씬 가벼운 무게였다. 갑자기 '요놈들한테 힘자랑 좀 해볼까.' 하는 장난기가 일었다. 내가 벤치에 드러누워 번쩍 들어 몇 차례 올렸다 내렸다 하고 있었더니 무슨 만들 게 있거나 그릴 게 있으면 할아버지는 못 하는 게 없다며 재료를 들고 쪼르르 내게 달려오곤 하는 은규가 환호성을 지르며 엄지척을 했다.
"와! 정말 힘 세다. 할아버지 최고!"
그런데 세은이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소리쳤다.
"할아버지 죽어, 그만해!"
"························"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는데···
이수봉에서 찰깍! 인증샷 후 곧장 하산.
한참을 내려오다 양지바른 곳을 만나 자리 잡았다.
나무 그늘에 자리를 깔곤 김밥 먹고 커피를 마신 후 누웠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 파란 하늘에 떠 있는 몇 조각 하얀 구름이 인생처럼 보였다.
'한바탕의 봄꿈', '인생의 부귀영화(富貴榮華)는 한 바탕의 봄꿈과 같이 헛됨'이라는 일장춘몽(一場春夢)이 절로 내 머릿속을 차지했다. '한바탕의 봄꿈'을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몸이 한결 가벼웠다. 족히 두 시간은 잠들었던 모양이다.
청계산에서 보낸 화창한 봄날의 여섯 시간.
최근 몇 경우에서 나는 '일장춘몽'이란 깨달음도 욕심 앞에서는 속절없음을 볼 수 있었다.
한 사람의 경우, 본인은 훤칠한 키와 준수한 외모에 우리나라 최고 명문 대학교를 졸업한 그 대학의 교수로 오피니언 리더 또는 최고(?)의 지성인으로 불릴 만큼 대중들의 부러움 대상이었을 뿐 아니라 부인 또한 본인과 같은 국내 최고 대학교를 졸업한 후 한 대학의 교수에 아름다운 외모까지 갖춘 데다 딸과 아들도 외고에 명문 대학을 졸업한 했으니 빠진 것 하나 없이 다 갖춘 양반이었다. 하지만 그는 욕심을 더 부렸다. 교수직을 박차고 나와 권력 핵심부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다음은 정이품 판서(判書) 자리를 노렸다. 그런데 여기에서 탈이 나고 말았다.
지금까지의 겉과 속이 달랐던 언행(言行)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들이 수없이 저지른 불법들이 다 드러났다.
그의 아내와 동생, 조카는 감옥살이를 하고 있고, 의사가 되었던 그의 딸은 의사시험 합격 취소는 물론 대학원과 대학교의 입학마저 취소되어 고졸(高卒)의 처지로 전락했을 뿐 아니라 진행 중인 재판을 볼 땐 그 자신의 감옥행도 멀지 않은 것 같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싶으면서도 자식을 둔 아비의 입장으로 볼 땐 안타까움이 전혀 없진 않다. 우리나라 최고 대학을 졸업한 엄마와 아빠의 유전자로 태어난 자식들인 만큼 가만히 지켜보기만 해도 될 텐데···
그의 욕심으로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다른 한 사람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초등학교만 나왔지만 독학으로 공부해 대학을 졸업하고 사법고시 합격한 후 수도권에서 시장(市長)과 도백(道伯)까지 역임한 걸 보면 이 사람 또한 대단한 두뇌의 소유자임에 틀림없다 싶다. 하지만 이 양반 또한 멈추는 법을 몰랐을까? 아니면 가슴이 없는 사람이었을까? 감언이설로 민초를 속여 취했던 종 2품 도백을 마다하고 나라님이 되겠다며 대권(大權)에 도전했다. 하지만 거짓과 위선은 잠시 숨길 수는 있을지 몰라도 영원히 감출 수는 없는 법.
대권 과정에서 그의 과거 행실과 함께 진면목은 물론 혐의가 짙은 부정부패와 비리가 땅콩 줄기를 뽑으면 뿌리에 달린 땅콩처럼 쏟아졌다. 몇 해 전에 불거져 공분을 산 형수에게 한 쌍욕은 물론 부동산 개발, 변호사비 대납, 대법원에서의 사법 거래 , 여자 문제, 폭력배 문제 등등 밑도 끝도 없이 쏟아지고 그의 부인이 누린 공무원 법인 카드 불법 사용뿐 아니라 그의 아들이 저질렀던 도박 등 불법까지 백일하에 드러나는 바람에 그 가족이 패가망신의 길로 접어들지 않았던가.
지나친 욕심이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들까지 망친 셈이다.
반면, 우리 선조들 중에는 이런 분도 계셨다.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잘 알려진 조선 후기의 김병연(金炳淵, 1807-1863).
과거에 응시하여 '홍경래의 난' 때, 항복한 선천부사 김익순을 비판한 내용으로 답을 적어 제출해 장원급제한 김삿갓은 후일 자신이 과거에서 비판했던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는 벼슬을 버렸다. 스스로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면서 항상 큰 삿갓을 쓰고 전국을 방랑하면서 각지에 즉흥시를 많이 남겼는데 그 詩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富者)를 풍자하고 조롱하는 詩가 많아 오늘날까지 방랑詩人, 민중詩人으로 이름을 떨친다.
인생은 머리로 사는 게 아니라 가슴과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세월임을 깨달은 날이었다.
나는 지금이 참 좋다. 입 안에는 임플란트가 하나씩 늘어나고 , 이비인후과에 가면 보청기를 추천받고, 안과를 찾아가면 돋보기를 권유받을 만큼 낡아가고 있지만 손주들과 응원과 사랑을 마음껏 주고받는 지금에 만족하면서 매사(每事)를 즐기는 내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다시 한번 실감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