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 18. 월요일
마음과 달리 몸이 게으름을 피우는 아침이었다.
은규를 등교시키고 돌아오자 마음은 '운동 나가야지···' 하는데, 몸은 안마의자에 앉고 싶어 했다.
그저께 토요일엔 집사람이랑 중곡동 사돈 부부와 함께 서울 둘레길을 걷고 일요일이었던 어제는 친구들과 검단산에 다녀온 데다 과음까지 했던 탓인지 오늘 하루쯤은 푹 쉬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마음을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술을 마시다 보면 한 잔이 두 잔 되고 두 잔은 석 잔이 되는 것처럼 운동도 하루를 쉬면 이틀 쉬고 싶고, 이틀을 쉬면 사흘 쉬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싶어 벌떡 일어나 생수 한 통 꽂은 쌕(sack)을 차고는 집을 나섰는데 시곗바늘은 벌써 열 시를 훨 지나 있었다.
양재천으로 가기 위해 아침마다 걷는 골목으로 들어서서 5미터쯤은 걸었을까?
갑자기 뭔가에 끌린 듯 둘러가는 길인데도 반대편에 있는 근린공원을 거쳐 양재천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길을 돌려 근린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에 들어서자 공원 안에 있는 인조잔디 축구장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일엔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매헌초등학교의 운동장으로 쓰이고, 주말과 공휴일 그리고 평일 8시 이전과 오후 4시 이후엔 주민뿐 아니라 직장인 등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어 늘 함성이 가득한 운동장이지만 코로나 19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작년 봄부터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잠시 느슨했던 때를 제외하곤 늘 꼭 닫혀 적막강산이었는데 아이들의 목소리라니 싶어 쳐다보았더니 체육수업인 듯 스무 명 정도의 남녀 아이들이 줄을 서서 차례대로 축구공을 차고 곁에선 선생님인 듯 두 분이 지도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보고 있는데 문득 저들 사이에 내 외손자 은규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 전쯤 등교시키면서 보았던 은규의 차림새를 떠올리며 남자아이들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검은색 점퍼를 입혔지만 안에는 녹색 셔츠, 검은색 바지, 검은색 마스크, 검은색 운동화.
제법 떨어진 거리라 분명치는 않았지만 한 아이가 눈에 쏙 들어왔다.
녹색 셔츠 OK, 검은색 바지 OK, 검은색 마스크 OK, 검은색 운동화 OK.
'저놈이 은규다.' 싶었다. 무엇보다 축구공을 쫓아 달리는 폼이 틀림없는 은규였다.
"은규야! 송은규!" 제법 큰소리로 불렀지만 멀어서 못 들었는지 은규의 반응은 전혀 없었다.
아이들은 한 명씩 차례대로 골대 앞까지 축구공을 드리블해 가서 슛을 했지만 외부인은 운동장에 들어가면 안 되기에 밖에서나마 조금은 더 가까이서 볼까 싶어 축구골대 뒤쪽으로 자리를 옮겨 은규의 차례를 기다렸다. 은규의 차례가 되었다.
골대 가까이 달려오는 은규를 불렀다.
"송은규!"
은규가 고개를 돌리며 "할아버지···" 하면서 한 손을 번쩍 들었다.
1,2초의 만남이었지만 가슴이 뭉클할 만큼 행복했다.
작년에 초등학생이 된 은규가 운동장에서 체육수업받는 것을 근 2년 만에 처음 본 것이다.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스포츠센터를 오가면서 수시로 보았을 텐데···, 코로나만 없었다면 축구장 위의 높고 파란 가을 하늘에 만국기가 휘날리면서 운동회도 열리고 우리 가족은 모두가 참석해 목이 터져라 원준과 은규를 응원했을 텐데···
한창 뛰놀 아이들이 저 좋은 운동장을 두고 학교 강당에서 체육수업을 해야 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늦었지만 백신 접종률이 높아지면서 '사회적 거리두기'가 조금씩 완화되고 있을 뿐 아니라 정부 시책 또한 다음 달인 11월부터는 '위드 코로나(with corona)' 즉 코로나와 공존하면서 '단계적 일상 회복'으로 기조를 바꾼다니 다행이다 싶다.
우리 모두의 미래인 아이들이 오늘의 은규처럼 운동장에서 걱정 없이 맘껏 뛰노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은규의 "할아버지!"란 외침 한 마디와 단 1,2초의 만남이 하루의 즐거움과 행복을 선물한 날이다.
이처럼 작고 소소한 일상 하나하나에도 행복이 풍선처럼 커지는 가을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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