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7. 11. 토요일
멈춰 버린 시곗바늘 마냥 여유로운 아침이었다.
집사람과 마주 앉아 아침 식사를 하던 중 '어제라면 벌써 은규가 와 있고, 세은이는 몇 번씩이나 들락거렸을 시간인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어제 했던 세은이와의 약속이 생각났다. 일주일 중 목요일 하루밖에 등교하지 않는 원준이랑 돌봄교실을 포함해 서너 번 등교하는 은규와는 달리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 5일 꼬박 어린이집에 등원했던 세은이가 지난 주 제주도를 다녀온 가족여행 탓(?)에 오늘까지 이번 주 5일 간은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고 집에 데리고 있기로 함에 따라 하루에 몇 번은 "할아버지 있어요?", "할아버지 뭐 해요?" 또는 "은규 오빠, 우리 같이 놀자."하면서 들락거리곤 했었다.
더욱이 어제는 은규가 종일 우리 집에 있는 금요일이라 세은이는 다리가 아프도록 4층과 5층을 오르내렸다.
어제는 재미 있게 놀던 은규가 6시가 되어갈 무렵 세은이랑 쇼파에 앉으며 TV를 켰다.
며칠 전부터 내게 말했던 EBS의 어린이 프로그램 '보니 하니'를 본단다.
잠시 후 세은이가 TV를 가리키며 말했다.
"할아버지, 저거 다음에 사 주세요."
화면에서는 얼음을 갈면서 광고를 하고 있었다. 팥빙수를 만드는 장난감 광고였다.
문득 좀더 어릴 때의 세은이가 오버랩되었다.
그때도 TV에 장난감 광고만 나오면 세은이는 그 화면을 가리키면서 "할아버지, 저거 다음에 사 주세요." 했었지. 그리고 나는 그럴 때마다 "그래 세은아, 다음에 사 줄게" 했었지. 그렇지만 내가 그 약속을 몇 번이나 지켰던가 싶었다.
기껏해야 한두 번밖에 안 될 것 같았다.
그 사이 6살이 된 정세은.
어제도 나는 똑 같이 말하고 말았다.
"그래 세은아, 다음에 저거 사 줄게."
하지만 곧장 세은이와 세끼손가락을 걸고, 엄지손가락으로 도장도 찍고, 손바닥을 마주 스치는 복사까지 했었다.
세은이 어미가 전화를 했다.
"아빠, 팥빙수 장난감 안 사도 돼요. 세은이는 장난감보다 팥빙수 만드는 걸 좋아하니까 재료 사다 같이 만들게요."
"세은이와 약속했으니까. 일단 올려 보내라."
10여 분쯤 지났을까?
외출 단장에 마스크까지 착용한 세은이가 우리 집에 들어서면서 말했다.
"할아버지, 장난감 안 사도 돼요. 엄마가 팥빙수 재료 사서 같이 만들어 준대요."
"그래, 그럼 우리 이마트에 가서 팥빙수 장난감도 사고 팥빙수 재료도 사자."
"네, 좋아요."
운적석 옆자리에 앉은 세은이는 신이 났다.
운전하는 나를 연신 바라보며 밝은 미소를 보내더니 말했다.
"할아버지랑 둘이 차 타고 이마트에 가는 건 엄청 오래만이예요."
뜨끔했다.
속마음이 들킨 것처럼 마음이 아리었다.
지금 10살이 된 원준이는 첫 외손자인데다 은규가 태어나기까지 3년 이상은 혼자였기에 내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었고, 올해 8살이 된 은규는 두 번째의 외손자지만 원준이가 웬만큼 자란데다 엄마랑 아빠가 직장에 메인 몸이라 내 사랑을 원준이 못잖게 받을 수 있었지만 세은이는 그러하지 못했다. 원준이와 은규는 아직도 여전히 내 손길이 필요해 그들 둘에 쏟는 시간과 사랑 표현에 비해 세은이에게는 반의반도 안되는 사랑밖에 표현할 수 없어 늘 미안하고 가슴이 아리는데···
개장시간에 들어선 이마트
장난감 코너가 눈에 띄자 세은이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장난감 코너에 들어서기만 하면 카봇 등 로보트나 자동차부터 만지곤 하던 오빠들과는 달리 인형들을 하나하나 살폈다.그러고나서야 팥빙수 장난감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 바퀴를 돌면서 둘러보아도 그 장난감은 보이지 않았다.
세은이가 실망할 것 같아서 말했다.
"세은아 여기는 팥빙수 장난감이 없는가 봐. 그건 인터넷으로 사 줄테니, 오늘은 인형 하나 살까?"
"할아버지, 팥빙수 장난감은 안 사도 돼요. 대신 팥빙수 재료 사 주세요."
세은이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감동이었다.
세은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이것 저것을 카트에 담았다.
뽀미 사료
삼계탕 6개
팥빙수 재료
두 종류의 씨리얼 등등
···············
세은이의 장난감이랑 뽀미 사료 사러 이마트에 간다며 집을 나서는 내게 집사람이 다른 것은 사지 말라고 당부를 했지만 카트에 담긴 것은 대충 계산을 해도 10만원은 훌쩍 넘을 것처럼 쌓여 있었다.
세은이에게 말했다.
"세은아, 너무 많이 샀다고 할아버지 혼날 것 같은데 어쩌지? 몇 가지는 도로 갖다 놓을까?"
그러자 세은이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내가 할머니한테 변명해 줄게요."
"정말? 고마워. 다음에 또 세은이랑 할아버지 둘이서만 오자."
운적석 뒷자리에 앉은 세은이는 머리를 까딱이며 내가 모르는 동요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세은이와의 이마트 데이트.
토요일 오전의 짧은 시간에 만든 오래 남을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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