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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여행, 여행, 등산...

젖고 싶어 걸었다.

2019. 8. 15. 목요일

광복절 아침은 조용했다.

은규가 오늘은 유치원에 가지 않기 때문에 아침 일찍 우리 집에 오지 않을 뿐 아니라 원준이도 오늘은 경기도 광주 할아버지댁에 간다고 했으니 우리 집으로 공부하러 오지 않는다. 더구나 헬스장마저 공휴일 휴관이라 운동을 할 수 없으니 내 마음이 조금은 허전하면서도 느긋했다.

하지만 佛者인 집사람은 바빴다.

오늘은 음력 7월 15일.

불교의 5대 명절 중 하나인 백중이라며 백중기도를 가야 한단다.

 

집사람과 함께 발 끝 부딪치기 1,000번을 비롯해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 시간 남짓 몇 가지의 스트레칭을 하고는 귀리 등의 간단한 대용식으로 아침 요기를 하고 있는데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제법 큰 태풍 크로사가 동해안을 지나가는 오늘은 전국적으로 적잖은 비가 내릴 거라는 일기예보가 있더니 예보는 아주 정확했다.

식사를 마친 집사람은 늦었다며 서둘러 정토회 서초법당으로 떠나자 나만 남았다.

집에서 책이나 바둑 TV를 보면서 푹 쉬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조금씩 강해지는 듯한 빗소리에 문득 흠뻑 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젖어도 쉬이 마르는 운동 팬티와 민소매 셔츠차림에 작은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서는 편의점에서 시원한 생수 한 통과 껌 한 통을 산 다음 양재천으로 향했다.

 

비 나리는 양재천의 운치는 더 좋았다.

풀잎들이 저마다 예쁜 은구슬을 만들어 굴리는 게 얼마 남지 않은 여름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고, 산책로를 따라 활짝 핀 무궁화는 광복절이라 그런지 더 아름답고 더 싱그럽게 보였다.

양재천

양재천은 내게 아주 많은 것을 베푼 곳이다.

내가 마라톤을 시작했을 때는 풀코스를 완주할 수 있을 만큼의 연습량을 준 곳이고, 내가 색소폰에 입문하자 한 동안은 연습장이 되기도 했지만 매월 색소폰동호회의 공연장이 되어 나를 무대에 세워 준 곳이요, 또 내가 수필을 시작했을 땐 ‘양재천의 무논,, ’소금쟁이와 물방개‘ 등의 수필에 좋은 글감이 되어 주었으며, 詩를 시작하자 ’양재천의 풍경‘ 등 적지 않은 詩想을 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곳인가.

땀에 젖고 비에 젖어 걷는 걸음은 참 좋았다.

젖기로 작정한데다 생각에 젖고, 추억에 젖고, 뭇 그리움에 젖어 걷는 걸음은 차라리 행복이었다. 혼자 걷는 외로움은 상상 이상으로 행복했다.

양재천이 한강에 닿기 위해 안기는 작은 강인 탄천을 따라 걸을 때는 정말 비가 엄청 쏟아졌다. 하지만 조금만 더 걸으면 수서역이 나오고 곧 대모산에 오른다는 생각에 걸음은 한결 가벼워지고 굵은 빗줄기는 시원하게만 느껴졌다.

광평교에서 탄천을 벗어나 수서역에 도착하자 시계는 정오를 넘고 있었다.

서둘러 김밥집을 찾아 김밥 두 줄을 사서는 한 줄은 그 자리에서 꿀꺽.

나머지 한 줄은 배낭에 넣고는 대모산으로 Go Go∼

아무도 없는 산길.

참 좋았다.

나지막이 내려앉은 안개가 산길을 신비롭게까지 만들었다.

여름들어 자주 내린 비 덕분에 곳곳에 돋아난 갖가지의 버섯들이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산길을 걷는 동안 각종 참나무에는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TV 프로그램을 통해서 본 영지버섯을 꼭 닮은 버섯들도 꽤 많이 돋아 있었다.

대모산 정상에서 남은 김밥 한 줄로 요기를 하고는 구룡산으로…

근데 구룡산 하산 중 폰의 밧데리가 완전 방전.

사진 촬영은 말할 것 없고 등산앱 트랭글도 완전 스톱.

 

능인선원을 거쳐 집에 도착하자 근 4시가 다 되었다.

트랭글에는 5시간 27분 동안 20.47km를 걸었단다.

하지만 밧데리 방전으로 트랭글이 중단되고도 30여 분을 걸었으니 오늘은 6시간에 23km쯤 걸었겠다.


땀에 젖고

비에 젖고

생각에 젖고

추억에 젖고

그리움에 젖고

외로움에 젖어 걸었던 오늘은 비와 한층더 친해진 행복한 날이었다.



재천 박덩굴, 박들이 올망졸망 달렸지만 덩굴이 시든 걸 보면 어느새 가을이 우리 곁으로 다가선 모양이다.


광복절의 무궁화는 어느 때보다 더 싱그러웠다.


양재천 코스모스 식재지- 머잖아 코스모스 활짝 피면 장관이겠다.


양재천 슈크렁

얼마전 은규를 데리고 양재천에 갔을 때 은규는 슈크렁을 보더니 강아지풀 아빠란다.


불과 열흘 전만 해도 피지 않던던 벼가 피기 시작했다.

따가운 햇살이 곡식을 익게 한다더니 우리를 잠 못이루게 했던

열대야는 이들이 불렀나 보다.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

거미는 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거미줄을 다 쳐놓고 먹이가 걸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양재천의 수양버들

나는 걷던 중 이 수양버들을 보면서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지난 일요일 웰리힐리를 출발해 집으로 돌아오던 차 속에서다. 승용차 뒷자리의 집사람과 나 사이에

앉은 은규가 차창 밖을 보면서 무슨 영어 단어를 말하며 지나갔단다. 

내가 물었다.

"은규야, 뭐라 그랬어?"

그러자 "위핑 윌로우"란다.

"위핑 그게 뭐야?"

 "할아버지 몰라요? 할아버지가 말했잖아요."

"내가 말했다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나는 말한 기억이 없고 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은규야, 할아버지는 말한 적 없는데, 그리고 뭔지도 모르겠고…"

"양재천에 갔을 때 나뭇잎이 아래로 자라 물에 닿는 나무 보고 말했잖아요."

그제서야 나는 '아차' 싶었다. 곧바로 폰으로 영어사전을 검색했다.

역시 그랬다. '수양버들'을 입력했더니 'weeping willow'였다. 

보름쯤 전 은규를 데리고 양재천으로 갔다가 소나기를 만나 흠뻑 젖었던 날이다.

양재천을 산책하면서 은규에게 나무이름과 꽃이름을 알려주던 중 은규는

가지들을 축 늘어뜨린 모양이 신기했던지 수양버들을 가리키며 뭔지 물었다.

그래서 나는 '수양버들'이라 알려준 후 은규가 영어유치원에 다니기에 폰으로

영어사전을 검색해 영어단어 'weeping willow'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나는 까맣게 잊었는데 은규는 기억하고 있었다.

가르쳐 준 할아버지가 그것도 모르냐는 듯

빤히 나를 바라보는 은규가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양재천변에 자라는 참외덩쿨, 내 주먹만한 참외가 달린 정겨운 모습에 나는잠시

어릴 적 친구들과 함께 수박과 참외를 서리했던 추억에 젖을 수 있었다. 또 강에서 멱을 감다 강변의 모래밭에

함부로 싼 ○에서 수박싹이 트고 자라 수박이 달리면 똥수박이라면서도 따서는 맛나게 먹었던 추억까지… 



양재천과 탄천이 만나는 지점 부근에 있는 작은 연못

내가 양재천에 올 때마다 들러서 쉬는 곳.몇 년 전에는 이맘 때쯤 오면 수련꽃이 예쁘게 피었었는데

이곳 저수지의 소금쟁이와 물방개를 보고 수필도 썼었는데


경기도 용인시 구성면 법화산 기슭에서 발원해 성남시를 거쳐 한강으로 유입되는 35.6km의 준용하천인 탄천

탄천은 다음과 같은 재미난 전설을 가지고 있다.

하루는 염라대왕이 저승사자에게 삼천갑자(18만년)를 살았다는 동박삭을 잡아올 것을 명했다. 그러나 동박삭은 워낙 둔갑술이 뛰어나 저승사자도 어쩔 수가 없었다. 고심하던 저승사자는 꾀를 내 이 냇물에서 숯을 빨기로 했다. 이 모습을 본 한 행인이 “내가 삼천갑자를 살았어도 숯을 빠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하자 저승사자는 그 사람이 동박삭인 것을 알아채고 저승으로 데려갔다. 그때부터 ‘숯내’ 또는 같은 뜻의 한문으로 탄천이라 부르게 됐다.

 


수서역 부근에서 김밥 한 줄로 요기









대모산에서 전망이 가장 좋다는 곳에서 바라본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