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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여행, 여행, 등산...

동해안을 걷다 (13)- 마지막날의 동행(同行)

2017. 10. 12. 목요일

이번 도보여행의 마지막 날.

자전거도로를 따라간다면 29km만 걸어도 되는 날이다.

알람 소리에 어김없이 일어나긴 했지만 잠이 덜 깬 것처럼 약간은 몽롱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사돈께서 잠드신 뒤에야 전날의 블로그를 쓰기 시작했으니 내가 잠자리에 든 시간은 또 12시를 훌쩍 넘었던 것이다. 좀 추울 거라는 날씨예보에 맞춰 사돈과 함께 준비를 마치고 모텔을 나와 곧장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참 걷던 중곡동사돈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사돈, 이 길이 맞아요? 아닌 것 같은데…"

나도 '바다 쪽이 아니고 왜 산 쪽으로 가지… 이상하다.' 여기며 걷던 터라 걸음을 멈추고 핸드폰을 꺼내면서 말했다.

"좀 이상하죠. 그런데 어제 식당 아주머니는 이 길을 따라 곧장 가면 부산이라고 했었는데…"

어제저녁의 일을 떠올렸다.  

9시가 넘어서야 내가 투숙한 모텔로 찾아오신 중곡동사돈을 모시고 저녁식사도 할 겸 삼겹살 안주에 소주를 한잔할 요량으로 모텔 바로 앞의 음식점으로 갔더니 몇 사람이 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지만 식당주인은 시간이 늦어 영업이 끝났다고 말하길래, 나는 '오늘 저녁은 또 굶나.' 여기며 돌아서려 할 때 사돈이 주인에게 간단히 먹을 식사만이라도 좀 안 되겠냐고 부탁을 하자 식당주인은 된장찌개는 된다고 했다.

그런데 그 된장찌게는 어찌 그렇게 맛있을까?

말끔히 비워진 반찬 그릇에 리필하러 온 주인에게 물었다.

"사장님, 공기밥 하나 더 주세요. 이길 쭉 따라가면 부산 나오는 거죠?"

"네, 곧장 가시면 부산이에요."

 

핸드폰의 길 찾기로 확인했더니 우리가 걷고 있었던 길을 따라가면 부산인 것은 맞았다. 그런데 동래 방면이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송정을 거쳐 해운대 해수욕장 쪽으로 가야 하기에 이 길로 가면 안 되는 것이었다.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돌고 돌아 마침내 송정으로 가는 기장대로에 접어들었는데 걷기 시작한 지 1시간이나 되었다.

'아차'

나는 이번 도보여행을 준비하면서 스마트폰에 '트랭글'이란 앱(App)을 깔았는데 보행시간과 보행거리는 물론이고 地圖와 도보구간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편리하고 유용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도보여행 중 06시에 도보를 시작하면서 켜서 도보가 끝나는 시간에 끈 다음 그날의 모든 기록을 체크하고 관리하는데, 글쎄 오늘은 그만 앱 켜는 걸 잊고 있었던 것이다.

사돈께 얼마나 걸었을지를 묻자 사돈께서는 자신의 앱(나와 다른 앱)을 들여다보며 4km를 걸었단다.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한결 가벼워진 내 발걸음.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을 종주할 만큼 등산을 좋아하시는 사돈의 발걸음.

발걸음 가벼운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내게는 외손자이지만 사돈에게는 친손자인 은규의 사랑스러운 모습과 잘 자라는 모습부터 최근의 북한 핵실험 등으로 인한 전쟁발발 걱정, 정치인 무용론 등등 세상사를 나누며 길을 걷고 걸었다.

3년 전 고향으로 가는 도보여행 때는 경산시 자인읍의 한 모텔에서 고향친구와 마지막 밤을 자고는 다음 날 그와 함께 고향까지 가는 마지막 구간을 걸으면서 고향이야기, 고향친구이야기, 정치, 사회 등 등의 세상사를 나누며 걸었었는데, 이번에는 부산 기장에서 보낸 마지막 밤과 부산역까지 가는 마지막 구간을 사돈과 함께 걸으며 세상이야기를 나눈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참 재미가 있었다.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는 예보와 달리 흐린 날씨에 바람은 제법 세찼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어제 하루 종일 맡지 못했던 상큼한 냄새가 난다 싶더니 이내 어제는 하루 종일 듣지 못했던 소리도 들려왔다. 

바위 때리는 파도 소리 찰싹찰싹∼, 먹이 찾아 하늘 높이 오른 갈매기 끼룩끼룩…

드디어 파란 바다가 보였다.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룬 송정 바닷가의 바위를 주춧돌로 삼아 세워진 절 하나가 나타났는데 바로 해동 용궁사.

울산지점장 시절 집사람과 한번 다녀간 절이지만 그때 보았던 아름다운 조망과 경치가 기억나 사돈을 모시고 온 것이다.

佛心 좋은 집사람과 중곡동 사부인을 대신해 나와 사돈은 손주와 가족들의 건강과 행복을 염원하는 합장 기도부터 했다. 

푸른 바다와 멋진 용궁사를 배경으로 몇 장의 기념만 찍고는 바닷가 한 식당에서 맛난 미역국으로 아침 요기를 하고 또…

어제와는 정 반대의 길,

끝없이 펼쳐진 바다.

곳곳의 절경으로 눈을 호강시키는 사이 우리의 다리는 달맞이 고개를 넘어 해운대해수용장에 접어들었다.

몇 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오늘부터 시작된다는 부산 국제 영화제 막바지 준비가 한창인 해운대 백사장을 걸었는데 백사장 바로 앞에 공사가 한창인 어마무시한 건물, 벌써 50여 층은 세워진 것 같고 그 위로도 계속 올라가는 것 같았다.

그 엄청난 건물이 완공되어 입주까지 완료되면 해운대의 바다와 백사장은 완전 그들의 앞마당이 되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우리나라 최고 해수욕장이자 외국에도 많이 알려진 비치(Beach) 코앞에 저런 건물의 허가가 났을까 싶었다. 그 현장을 지나치면서 쳐다본 공사안내 개요도엔 '해운대 엘시티 더샾'라고 적혀있었다. 엘시티라면 그 회사의 회장이 유력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주었다는 혐의로 구속수감되어 온 나라를 시끄럽게 했던 곳이 아닌가 싶었다. 

역시…

 

해운대를 지나 광안리 회센터.

울산지점장 시절 회의차 부산을 다녀가면서 동료지점장들과 가끔 들리곤 했던 곳.

그런데 10년 지난 오늘은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마음이 후해 보이는 할머니의 가게에서 그 할머니가 추천하시는 가을 전어를 샀더니 그 할머니는 한 간판을 가리키며 그 집에 가 있으란다. 잠시 후 푸짐하고 먹음직스러운 회가 우리를 찾아왔다. 뼈째 얇게 썰어서는 얇게 썬 양파채와 섞고 볶은 참께를 뿌린 전어회.

아기 손바닥만 한 들깻잎에 먼저 전어회를 수북이 올린 다음 횟집의 특별 막장을 듬뿍 넣고 마늘을 올려서 먹는 맛.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간 며느리가 돌아온다더니… 정말 꿀맛이었다.

전어회를 좋아하는 집사람이 떠올랐다.

생전에 가을이면 뼈째 얇게 썬 전어를 무 생채에 무쳐 잡수시는 걸 무척 좋아하셨던 아버지와 어머니도 보고팠다.

하지만…

이제 10km도 아니 남은 거리, 소주도 한 병 시켰다.

소주도 꿀맛.

자식들을 나눠 가진 사이,

사돈지간인데 무엇인들 맛나지 않으랴…

둘이서 한 병을 비웠지만, 오랜만에 소주를 마신 내 발걸음은 더 가벼워졌다.

12일 동안 천 리도 더 걸었으니 이젠 지칠 만도 한데 지치기는커녕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이건 내 능력이 아니라  소주의 힘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스포츠에서는 금지약물이 있고, 금지약물을 복용하다 발각되면 모든 걸 다 잃는구나 싶었다.

대연동에 들어설 무렵부터 살살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피할 비는 아니었다.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나란히 걸으면서 제대로 가고 있는지 서로 앱을 들여다보며 걷는데 사돈의 발걸음이 조금 무거워 보였다.

아주 약간 저는 듯 보이기도 했지만 요즘 산행을 좀 덜해서 저러시나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비바람이 점차 거세졌다.

부산역을 6km쯤 남겼을 때는 안 되겠다 싶어 판초우의를 꺼내 입었다.

부산역에서 기다릴 친구 생각에 내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는데 사돈은 한 발을 더 절룩거리며 걷고 있었다.

불편한 데 있으신지 여쭸지만 괜찮으시단다.

나와 함께 걷기 위해 새로 산 운동화가 좀 불편할 뿐이란다.

오래 신어 발이 편한 운동화가 있지만 사부인께서 일부러 가벼운 운동화를 새로 사셨단다.

그런데 새 운동화라는 게 문제였다.

아직 길나지 않아 발을 편하게 하기는커녕 발가락을 불편케 만들어 걷기 힘들게 하는 모양이었다.

새것과 편한 것. 새것이라고 다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닌데 , 나도 새것만 보이면 갖고 싶으니…

마침내 부산역이 보이자 나는 뛰듯 걸었다.

비 오는 부산역 광장.

자전거길을 따라 곧장 왔으면 29km였는데, 우리는 좀 우왕좌왕하고 또 좀 둘러 다니느라 4km를 더 걸어서야 도착했다.

나는 잠시 두리번거리다 사진을 찍고는 역사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 친구가 전화를 했다.

"석도야, 어디까지 왔어?"

광장 한쪽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내가 급하게 움직였으니 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고마운 친구!'

 

한 시간을 기다려 서울행 SRT에 나란히 앉은 중곡동사돈과 나.

점심에 몇 잔 들이켠 소주랑 장거리 도보의 피로감으로 금방 잠에 빠져들 줄 알았는데 눈은 똘망똘망.

나는 지금까지 여럿이 걷는 것보다 혼자 걷는 것이 훨씬 좋다고 생각했었다.

여럿이 걷자면 좁은 도로에서의 위험성이 커지고, 또 서로 보조를 맞추어야 하는 등 불편함이 아주 많을 것 같았다.

그런데 비록 하루만의 도보였지만, 오늘 33km의 길을 사돈과 나란히 걸으면서 바르게 가고 있는지를 서로 체크하고, 가족이야기를 비롯한 세상 이야기를 주고받고, 또 힘들어 보일 땐 서로 응원도 할 수 있어 지루함과 외로움이 덜했던 걸음이었음을 알았다. 혼자의 도보여행보다는 좋은 사람과의 同行하는 도보여행이 좋고, 혼자의 삶보다는 좋은 사람과 同行하는 삶이 훨씬 알차고 행복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다음부터의 도보여행은 필히 둘이서, 그것도 집사람과 함께 하리라 마음먹었다.

이번만큼 긴 시간, 먼 거리 걷지는 못하더라도 세상의 아름다움에 눈을 빼앗기고 마음까지 뺏었기며 느릿느릿 걸으리라.

시나브로 걸으면서 혼자라서 먹지 못했던 맛난 것도 먹으리라 마음먹으며 비몽사몽에 빠졌다.

"이 나이에 웬 천 리 길 도보냐 그것도 혼자서" 라며 걱정하던 가족들과 친구들이 적지 않았고, 심지어 차로 가면 한나절도 걸리지 않는 길을 열사흘이나 고생을 사서 한다며 어리석다고 한 친구도 있었다. 그리고 약 520여 km의 도보의 실행에 13일간의 시간과 적잖은 비용이 들기도 했지만, 이번 도전을 준비하면서 열심히 운동해 몸을 만들었던 덕분에 더 좋아진 내 건강, 또 내가 걷는 동안 내내 가족 모두가 한 뜻 한 마음이 되어 나를 걱정하고 응원하면서 더 돈돈해진 가족사랑. 여기다 두 사돈들과의 情 또한 더 도타워지고, 그리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킴으로서 스스로 느끼는 대견함과 자존감, 성취감이 나를 살찌우고 있음은 투자한 모든 것의 몇 배나 되는 수확을 하였으니 '올 가을은 내게도 풍년이다.'라 생각하며 들뜬 기분에 있을 때 객실 안에 들려오는 안내방송은 기차가 수서역 도착하고 있음을 알렸다.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선 우리 집.

현관에는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신발이 모여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세은이와 은규, 원준이는 서로 자기부터 먼저 안아달라며 두 팔을 활짝 벌려 달려와 내 양팔에 매달리고, 아이들의 뒤편에서는 집사람과 딸, 사위들이 서서 박수를 치며 나를 반겼다.

내 음력 생일은 아직 한 달이나 남았는데 식탁은 생일상처럼 잘 차려지고…, 

13일간의 의미로 케이크에 13개의 양초를 꽂아 불을 붙이자 손주들은 노래를 불렀다.

"완주 축하합니다. 완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할아버지 완주를 축하합니다…."

가족과 함께하는 더없이 행복한 날이다.

이런 행복이 오래오래 가길 기도한 날이다.  

 

 

이젠 저 이정표를 따라

 

중곡동 사돈과 함께하는 길을 나서며

해동 용궁사 일주문

해동 용궁사의 전경

인생아!

가슴을 활짝 펴라

궂은날이 새고 나면 해가 뜬다.

 

 

 

 

 

달맞이 고개의 해월정

 

해운대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조선비치호텔과 그 앞바다의 인어상(?)

 

광안리 회센터

 

 

 

광안대교를 배경으로…

 

대연동에서 만난 부산역 이정표가 얼마나 반갑던지…

 

나를 응원하러 오셨다가 고생하시는 중곡동 사돈

 

드디어 500Km 도보의 종착지 부산역 도착

 

 

친구가 전해준 꽃다발을 받고…

 

 

 

 

가족들과의 맛난 저녁식사에 이어 멋진 완주 축하 파티까지

 

이번 도보여행은 행복.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행복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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