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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방

[수필] 곰탕 한 그릇



곰탕 한 그릇

 

이 석 도

 

   서초동의 어떤 곰탕집에서 혼자 점심을 먹고 있었다.

   할아버지 한 분과 할머니 한 분이 함께 들어와서는 두리번거리시더니 빈 자리가 없는지 내게 합석을 청해 같이 앉았다. 팔순은 훌쩍 넘었을 듯한 노부부처럼 보였는데 곱고 건강하게 늙은 모습이 보기에 참 좋았다.

  

   도가니탕을 주문하고 나서 한참 동안 할머니와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던 할아버지는 두 개의 컵에 물을 따라 하나를 할머니에게 내밀었다. 또 할아버지는 탁자 위에 놓여 있는 항아리에서 김치와 깍두기를 꺼내더니 맛있어 보인다면서 가위로 잘게 잘라 접시에 담았다.

   도가니탕이 나왔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도가니탕에 살짝 소금을 친 다음 잘게 썬 대파를 넣어 휙휙 저은 후 맛을 보았다. 그리고는 할머니에게 먹으라고 권하고 나서야 자신의 그릇에도 소금과 파를 넣었다. 맛나게 드시던 할아버지가 자신의 그릇에 들어 있던 도가니 몇 점을 꺼내더니, 할머니의 도가니탕에 넣어 드리면서 말했다.

   “물렁뼈가 무릎에 좋대.”

   그러자 할머니는 고기를 도로 꺼내 할아버지의 그릇에 넣으며 말했다.

   “좋다니, 당신이 많이 잡수세요.”

   몇 점의 도가니가 양쪽 그릇 사이를 왔다 갔다 하길 두어 번, 주위를 둘러보시던 할아버지는 한쪽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국물이 보약이라네, 남기지 말고 다 먹어요.”


   한창 나이 때의 이혼은 말할 나위 없고, 해마다 황혼이혼이 늘고 있다는 세상인데···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로를 걱정하시는 그분들이 참 보기 좋았다.

   삼십 수 년 전, 내 결혼식에서 주례가 우리 부부에게 검은 머리가 파뿌리처럼 되도록 화락하게 살겠느냐 물을 때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그러겠노라 약속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곤 밴댕이 소갈머리처럼 굴면서 적잖게 아옹다옹했던 지난날들이 후회스러웠다. 지금부터라도 저들 모습으로 늙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평소 퇴근길이면 주로 외손자나 딸들이 좋아하는 먹거리들이나 들고 다녔던 내 손,

   그날  가벼운 발걸음으로 퇴근하는 내 손에는 포장된 곰탕 한 그릇이 들려 있었다.

   나도 집사람 앞에 놓인 곰탕에 소금을 치고 파도 넣어주고 싶었다.

   (2014.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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