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조끼
이 석 도
퇴근길에 보니, 늘 텅 비어있던 건물에 ‘과잉생산 긴급 처분’이라 쓰인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등산복을 비롯한 여러 가지 아웃도어 제품을 팔고 있었다. 호기심에 들어갔다가 마침 내게 잘 어울릴 것 같은 등산조끼가 있어 사들고 퇴근했다.
집사람은 조끼를 입은 내 모습을 보고 말했다.
"연두색이 잘 어울리고 괜찮네, 잘 샀어요. 어디 꺼야?"
그러고는 왼쪽 가슴에 새겨진 상표를 확인하더니 환불해 오라며 말했다.
"왜, 이름도 없는 이런 걸 샀어? 좀, 좋은 걸로 사야지." .
나는 집사람에게 방송에서 본 뉴스를 들려주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동네 뒷산에 오르면서도 전문 산악인들이 히말라야에 오를 때 쓰는 장비와 의류를 고집한다는 이야기. 또한 지나치게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아웃도어 열풍의 폐단과 과소비를 지적한 뉴스 내용이었다. 그리고 고가인 유명 상표 등산화나 등산의류의 기능성이 중저가 제품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는 소비자 단체의 조사 결과도 말해주었다.
얼마 전 친구들과 관악산에 올랐다. 나는 새로 산 등산조끼를 입고 갔다. 친구들도 모두가 긴팔 셔츠에 민소매의 등산조끼를 입고 있었다.
친구들과 산행을 마치고 식당에서 점심을 겸해 한창 술잔을 주고받던 중, 갑자기 한 친구가 등산조끼가 없다며 배낭을 뒤졌다. 생각해보니 산에 오르면서 정상에 오르기도 전에 땀에 흠뻑 젖은 우리들은 하나둘 조끼를 벗어 배낭에 넣거나 허리춤에 묶었다. 그리고 정상 부근의 공터에 둘러앉아 간식을 먹었다. 조끼를 잃어버린 친구는 한참 기억을 더듬더니, 간식을 먹을 때 조끼를 벗어 옆의 나뭇가지에 걸어둔 것 같다고 했다.
한 친구가 물었다.
“비싼 것인가? 어떡해…”
친구는 브랜드와 가격을 중얼거리며 조끼를 찾아 산에 다시 오를 채비를 하는 걸 보니 꽤 비싼 명품 조끼였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다른 친구들은 등산객들이 많은 주말인데 여태 거기에 있을 리 만무하다며, 다시 산에 오르는 걸 말렸다.
식사가 끝나자 총무가 산행 비용을 갹출했다.
지갑을 꺼내기 위해 등산조끼 주머니를 뒤지던 나는, 한 친구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핸드폰과 지갑을 넣고 편하게 등산했던 내 조끼를 참 잘 샀다는 생각을 했다.
“친구야, 등산조끼는 주머니가 많고, 입기 편하면 되는 거 아냐? 다음에는 잃어버려도 별로 아깝지 않을 걸로 사라, 내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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