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4. 일요일
추석 황금연휴의 마지막 날이다.
9월 30일부터 오늘 10월 4일까지 5일 연휴로 몇 년 만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것이니 황금이란 낱말이 아깝지 않다.
그렇지만 지난 2월부터 우리들의 일상을 빼앗아간 '코로나'란 괴질이 아직도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바람에 정부 차원에서는 괴질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추석 연휴 기간 중 서울현충원을 비롯해 모든 국립묘지의 운영을 중지했을 뿐 아니라 국민들에게도 여행 및 귀성(歸省)과 성묘의 자제 등을 간곡히 당부한 탓에 전혀 한가위답지 않은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과 사회 분위기 때문에 명절 때마다 여행객들로 넘쳐나던 인천공항은 십여 년 전 폐교된 내 고향의 초등학교처럼 을씨년스럽기조차 하고, 가까운 친지 방문은 몰상식한 행동처럼 여겨진 별난 추석이었다. 우리 부부도 추석 당일만 부천의 형님댁에서 차례를 모신 후 돌아오는 길에 작은 고모댁을 잠시 들렀을 뿐 연휴 대부분을 두 딸네와 함께 지냈다.
대문만 열면 은규네가 있고, 한 층만 내려가면 원준이네가 있어 참 좋았다.
하루에 몇 번씩은 만나면서도 만날 때마다 몇십 년 만에 만나는 친구처럼 얼싸안은 채 좋아하는 세은, 은규 원준 등 세 놈의 외손주들 보는 재미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한 집에 살 듯 아래위층 모여 사는 덕분에 이 집 저 집 우르르 몰려다니기도 하지만 세 놈들이 우리 집을 놀이터에서 놀 듯 아무리 꿍꿍거리며 떠들어도 아래층이 원준이네라 층간소음 걱정 하나 없으니 얼마나 편하고 행복한지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실감한 날들이었다.
그런데 벌써 끝날이다.
아주 길 줄 알았던 연휴가 오늘이 마지막이란다.
맛난 추석 음식이었지만 대부분이 기름진 음식인 데다 또 며칠 연거푸 먹어서인지 조금은 질리는 것 같기도 하고, 잔치를 벌이듯 날마다 온 식구가 모여 집에서 식사를 한 통에 집사람이 많이 힘들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어 어제는 내가, 연휴 마지막 날인 일요일엔 바깥바람도 좀 쐴 겸 청계산 아래 맛집에서 외식 한번 하자고 했더니 모두가 좋아라 하며 맛집과 시간을 정했다. 보쌈 맛집으로 소문난 청계산 한소반에서 점심을 먹잔다.
내겐 딱 좋았다.
9월부터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양재시민의 숲 앞, 여의천에서 온몸 듬뿍 가을볕을 바르며 매일 10,000보씩 걷고 있는 집사람은 오전엔 햇볕이 좀 덜하다며 아쉬워했지만 청계산을 큼직하게 한 바퀴 걷고 싶은 내겐 안성맞춤이다 싶었다.
추석 다음날이었던 10월 2일엔 구룡산, 오늘은 청계산
평소보다 한 시간쯤 일찍 서둘렀더니
8시도 안 되어 도착한 옛골 등산로
중턱까지는 상수리, 신갈나무 등 참나무들이 많지만
중턱부터는 소나무가 무척 많은 청계산
내가 청계산을 자주 찾는 이유 중 하나가 소나무다.
산골에서 자라면서 온 산을 누볐던 어린 시절 친구처럼 지낸 나무가 소나무였어 그럴까?
꿈틀꿈틀 제멋대로 자란 老松은 보기만 해도 고향산에 온 듯 마음이 편안해진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듯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금강송도 좋지만
나는 나이가 들 수록 오랜 세월 갖은 풍파 다 견뎌낸 듯 이리저리 굽은 모습으로 자란
이런 老松이 더 좋더라. 木材로서는 빵점일 수도 있겠지만 주위의 잡목들은 물론
기암괴석과 잘 어울려 금수강산을 만드는 나무는 이런 낙락장송들이 아닐까.
나 어릴 땐
이처럼 두툼한 소나무 껍질은 칼로 예쁘게 깎아 그럴듯한 배 모형을 만든 후
하얀 종이로 만든 돛대를 한가운데 꽂아 강물에 띄워 보내곤 했었는데···
청계산 곳곳에서 보이는 재선충병으로 고사한 소나무 무덤
솔수염 하늘소란 해충이 소나무를 이렇게 枯死시키는 것도 모자라 급격한 기후변화로
백 년도 안 되는 훗날의 우리나라에서는 소나무들을 볼 수 없어질 거라는 뉴스가 있던데
그럼 내 손자의 손자들은 청계산에 올라 야자나무에서 야자열매를 딸까?
청계산 소나무숲길을 한참 걷다 보니 고향마을의 분위기를 닮은 것 같았다.
아기 울음소리 끊어진 지는 십수 년, 청년은 고사하고 중장년마저 거의 없고
할머니 할아버지들밖에 계시지 않는 고향처럼 소나무 묘목은 어디에서도 구경할 수가 없고,
한창 자란다 싶은 청년 소나무조차 한 그루 안 보이는 늙은 소나무만 즐비한 숲이었으니···
원터골 입구에서야 볼 수 있었던 소나무 조림지
오후 1시에 만나기로 했으니
정확히 맞추어 하산한 셈이었다.
5시간의 산행
5시간 만의 가족 상봉
문득 이런 자괴감이 들었다.
'오늘의 산행은 시간을 보내기 위한 수단이었구나.'
'인생 아니 삶은 결국 시간 보내기 게임이구나.'
하지만 이내 詩想 하나가 떠올랐을 뿐 아니라
산행 중 보았던, 늙어 더 아름다웠던
老松이 적잖은 위로가 되었으니
오늘 산행도 만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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