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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여행, 여행, 등산...

봄맞이 소풍



2020. 3. 14. 토요일

거실에서 메트를 깔고 시작한 스트레칭과 발끝치기에 이어 플랭크까지 마치자 8시가 다 되었다.

잠에서 덜 깬 은규가 아빠 품에 안겨서 올 시간이 넘었는데도 오지 않는 걸 보니 주말이구나 싶었다.

 

‘코로나 19’로 불리는 중국 우한發 폐렴이 2월 중순경부터 대구와 경북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감염증 확진자들이 강풍 속 들불처럼 급증하자 정부에서 어린이집과 유치원 뿐 아니라 초, 중, 고교의 개학을 1,2차에 걸쳐 3월 23일까지 연기했다. 아이를 어린이집 또는 유치원에 보내는 맞벌이 부부들은 이런 곳을 대신해 아이들을 잘 돌봐줄 수 있는 곳을 찾느라 무척 애먹을 텐데…, 손주 돌보는 일이라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고 우리 부부가 가장 자신있게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이기에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또한 같은 무렵 우리 가족이 거주하는 서초구에서도 확진자가 발생함에 따라 내가 詩를 공부하는 서초문화원과 운동하는 언남문화체육센터는 물론 구립 도서관, 공원 내 축구장 등 대중들이 즐겨 찾는 공공시설 모두가 휴관 또는 휴장에 들어가고, 문학 동호회, 산악회, 동기회 등 각종 모임과 약속들이 취소되거나 연기된 탓에 내 하루 일과는 외손주들과 어울리면서 양재천변을 뛰거나 걷는 게 전부이다. 

학교생활에 정을 붙이면서 한창 새 친구들을 사귀어야 할 은규는 유치원 졸업식과 초등학교 입학식이 연기된 바람에 아침마다 출근하는 엄마 아빠의 품에 안겨 학교대신 우리 집으로 오고, 어린이집 휴원이 날마다 즐겁기만 하다는 세은이는 3월부터 4학년이 된 원준 오빠의 손을 잡고 아래층에서 올라오면 나의 하루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놈들과 함께 공부하고, 함께 뒹굴고, 함께 나들이하는 일상. 

날마다 놀이터가 되는 우리 집은 난장판 되기가 일쑤고, 하루 종일 요놈들의 함성이 메아리처럼 들려오지만

옆집이 은규네 집이여서 다행이고, 아래층이 세은이네 집이여서 천만다행이다 싶을 때가 하루 수십 번.

3주 이상을 이렇게 보내고 있자니 오늘이 며칠인지, 오늘은 무슨 요일인지 통…, 그저 멍하다.

외손주들이 일찍 오는 날은 평일, 오지 않거나 느지막이 오는 날은 주말이라 여기며 지낸다.

코로나가 나에게는 폐렴균대신 멍청이균을 배달했구나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아침을 먹으면서 집사람에게 물었다.

“오늘은 뭘 하실 겨?”

“글쎄, 양재천이나 걸을까 하는데, 왜?”

“응, 난 구룡산에 갈 건데 같이 갈래?”

“구룡산? 예, 같이 가요. 안 그래도 구룡산은 한번 갔으면 했는데…”

“그럼 원준이도 데리고 11시쯤 갑시다. 가는 길에 김밥도 몇 줄 사고…”

····················

함께 가기로 했던 원준이가 출발 직전에 내복차림으로 올라오더니 말했다.

“할아버지, 오늘은 아빠랑 놀고 싶어요. 등산은 다음에 따라 갈게요.”

 

집사람이 부리나케 준비한 삶은 계란 2개와 커피, 몇 가지의 과일을 배낭에 넣어 집을 나섰다.

동네 분식집에 들러 김밥 2줄을 산 다음 꽃시장과 염곡사거리를 지나 산에 오르기 시작했으니…


산행의 출발점이 된 염곡사거리



낙엽이 그대로 쌓여 있고 발길이 뜸한 산길로 들어섰더니 경사가 얼마나 심하던지…

족히 60˚∼70˚는 될 듯한 경사인데도 집사람의 발걸음은 가벼워 보였다.


급경사를 올랐으니 숨 좀 돌리고…



봄은 이처럼 벌써 구룡산에 와 있었다.


내 고향 청도에서는 진달래가 열흘 전쯤 활짝 피었다던데

구룡산에는 드문드문 양지바른 몇 곳에서만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살아서는 우리들에게 열매와 그늘을 내주는 나무들이

죽어서는 이처럼 버섯에게 제 몸을 내주고 있었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인 우리 인간은 어떤가?


우환 폐렴으로 인해 시작된 사회적 거리 두기 탓에 집 밖으로 나갈 일이 별로 없어

면도를 하지 않았더니 듬성듬성 자란 수염, 아내는 내가 너무 늙어 보인다며 빨리 깎아라 성화지만

외손자 은규는 꼭 산타할아버지 같다면서 크리스마스까지 깎지 마란다.

그런데, 내 두 딸은 이 사진을 보더니 영락없이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젊은 애인을 데리고 등산 다니는 모습이라며 엄마 편에 섰다.


마침내 구룡산 정상 표지판을 밟는 아내


구룡산 정상에서 강남을 배경으로 한 컷 찰깍∼


아내가 급하게 준비한 삶은 계란이랑 과일도 맛났지만

분식집에서 사 간 김밥이 얼마나 맛나던지 

두어 줄 더 사 올 걸 그랬나 싶었다.

역시 땀 흘리고 먹어야…



하산길 곳곳에는 이처럼 고사한 나무들이 나뒹굴고 있었는데

지게를 지고 나무하러 다녔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작은 등걸 하나도 귀하고 반갑던 그때 그 시절

이 정도의 나무라면 횡재였을 텐데…



3시간 30분 동안 6.4km쯤을 걸어 염곡사거리로 되돌아온 산행

우한 폐렴의 창궐로 서초문화원의 강좌 뿐 아니라 각종 모임과 모든 약속이 취소된 데다 헬스장마저 휴관에

들어간 탓에 근 한 달 이상 동안 양재동을 벗어나지 않은 채 외손자들과 지내면서 양재천이나 거닐다가 봄향기가 간질간질 코끝을 간지럽히는 산길을 걸었더니 참 좋았다. 내가 등산 가자고 할 때마다 거절하던 아내가 선뜻 따라나선 등산이라 더 좋았다. 집사람과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 산행이라 훨 좋았다. 

오늘 코스가 매달 한두 번 이상은 산에 오르는 나에게야 그저 평범하거나 조금은 부족한 거리의  난이도였지만, 

몇 년 만에 등산하는 집사람에겐 결코 쉽지 않은 코스일 텐데도 지친 기색 별로 없이 오르는 모습이 얼마나 이뿌든지 더없이 즐거운 산행이었다. 봄볕 앉은 곳에서 집사람과 먹는 김밥 한 입, 과일 한 조각, 커피 한 모금 등 하나

하나가 보약이고 행복이었다. 곳곳에서 겨우내 발가벗고 있었던 나무들이 참새 혀 닮은 연둣빛 새순을 살짝

내밀기 시작하고, 여기저기 진달래 꽃망울이 봉곳봉곳 부풀기 시작한 구룡산은 그 자체가 힐링이었다.

원준이와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이 작지 않았지만 몸과 마음은 더없이 가볍고 맑은 산행이었다.

구룡산의 봄맞이가 얼마나 달콤하고 여유롭던지 차라리 봄맞이 소풍이었다.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던 중 집사람이 말을 걸었다.

"여보, 다음 주 토요일엔 당신 뭐 해요?"

"글쎄, 특별히 할 건 없는데, 왜?"

"그럼, 그날엔 대모산 갑시다."

"·················"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싶었다.

몹쓸 병인 줄로만 알았던 코로나19가 선물할 줄도 아는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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