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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안대규의 결혼식

2019. 3. 30. 토요일

 

해외출장 중인 원준 아빠만을 제외하곤 모두가 집을 나섰다.

은규네 3명과 원준이네 3명에 우리 부부까지 모두 8명의 총출동이다.

아주 가까운 친척의 경조사가 아니고는 全家族이 다함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경우는 처음이겠다 생각하면서 도착한 강남성모병원 건너편의 웨딩홀 아펠가모 반포점. 각계각층에서 보내온 화환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통로와 먼저 도착한 하객들의 사이를 헤치며 들어서자 화환의 꼬들보다 더 밝은 미소들이 우리들을 반겼다.

 

대규가 장가가는 날.

故 安時煥 회장님의 아들 안대규가 결혼하는 날이다.

신랑 대규가 여전히 아름다운 어머니는 물론 자신의 결혼을 축하해주기 위해 캐나다에서 일시 귀국한 두 누나들과 함께 시종일관 환한 미소로 축하객을 맞는 모습은 무척 보기 좋았지만….

오후 6시 30분, 예식이 시작되었다.

양쪽 어머니들의 화촉 점화가 끝나지 들려오는 사회자의 목소리.

“신랑입장!”

힘찬 팡파르 속에 신장 190cm의 잘 생기고 멋진 신랑이 성큼성큼 입장하는데, 나는 신랑의 씩씩한 모습에서 십수 년 전 돌아가신 회장님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30여 년 전,

대리로 승진해 한일은행 포항지점에서 3년째 근무하던 중 1988년 3월 화곡동지점으로 이동된 나는 1989년 8월 중순에 9월 11일 개점예정인 한일은행 서초중앙지점의 개설준비요원으로 발령 받았다. 자택이 서초동에 있으면서도 화곡동까지 출퇴근을 하느라 여간 힘들지 않았던 때라 여간 기쁘지 않았다. 또 부임할 지점은 집에서 10여분만 걸어가면 되는데다 서초동은 화곡동보다 부자들이 훨씬 많은 동네기에 영업실적이 매우 중요한 은행원으로서는 근무환경 또한 우수한 곳이라 집사람 역시 무척 좋아했다. 막 개점한 지점에서 대출과 섭외업무를 맡았다. 새로운 근무처에서 의욕에 불탔던 나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특히 새로운 거래처 유치를 위해 서초구 일대를 누비었다. 그러던 9월의 어느 날 나는 서울교대 주변을 샅샅이 누비다 특별한 목표를 세우게 된다.

내가 사는 아파트와 같은 블록으로 서울교대 뒤편에 있는 최고급 빌리지.

城郭처럼 높게 솟은 담벼락 속에 숨어 있지만 철대문 사이로 보이는 고급주택들과 마당의 파란 잔디, 담 위로 솟은 멋진 樹形의 소나무들을 볼 때마다 저런 곳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까 궁금해 했을 뿐 고객으로의 유치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었는데 그 날은 왠지 한번 부닥쳐보자는 생각이 들어 경비실에 들렀다. 그러고는 수시로 그 빌리지의 경비실을 찾아가 은행의 사은품 등으로 경비원들의 환심을 사면서 정보들을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다.

한두 달이 지나자 적잖은 정보가 주집되었다.

그 빌리지에는 14개의 주택으로 되어 있었는데, 각각의 주택은 대지가 100평이고 건평이 150평나 되며, 입주한 14세대 중 13세대는 이름만 대면 대부분이 알 수 있는 큰 기업체를 가진 쟁쟁한 분들이었지만 나머지 1세대는 재일교포 가족이었다.

나는 유치가 가능하리라 예상되는 4세대를 목표로 삼았다.

그중 최우선으로 삼은 세대가 재일교포 가족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빌리지로 찾아가 주위를 맴돌았다.

또 수시로 은행의 사은품과 구입한 신간 도서, 그리고 정성껏 쓴 손글씨 인사장과 예금안내장을 우편물로 보내면서 환심을 얻고자 했지만 허사였다. 때로는 경비실에 죽치고 있다가 가족들이 드나들면 뛰어나가 인사를 하면서 접근했지만 그것도 성과가 없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그날도 나는 빌리지의 경비실에서 경비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걸어서 빌리지를 나서는 재일교포의 부인이 보였다. 나는 절호의 기회다 싶어 따라가면서 인사를 하고 말을 걸었지만 한마디의 대꾸도 없이 미장원으로…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는 성경 구절도 있다던데…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란 속담이 있다던데…

하지만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찬바람만 맞길 1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자괴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1990년 9월 하순.

어느 날 경비실에 들렀더니 재일교포 회장님의 부인께서 출산을 했단다.

여태 딸만 둘이었는데 아들을 낳아 회장님께서 엄청 좋아하신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어둠 속의 성냥불처럼 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으니…

출산 소식을 들은 지 한 달쯤 지났을 무렵 나는 동사무소로 향했다.

그러고는 신생아의 주민등록등본을 신청했다.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타인의 주민등록도 주소만 알면 뗄 수 있었다.)

예상대로 아기의 출생신고가 되어 있었다.

주민등록표에 기재된 출생일을 기준으로 아기의 100일을 계산했다.

그러곤 아기의 백일을 D-day로 잡은 후 하나씩 하나씩 준비를 했다.

먼저 아기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넣어 ‘컴퓨터 사주’를 몇 곳에서 출력한 다음 그 중에서 내용이 가장 좋은 것을 골랐다. 그러고는 도장 파는 집을 찾아가 아기이름의 예쁜 도장을 팠다.

백일 이틀 전,

아기의 이름과 아기의 도장으로 예금통장을 만든 다음 우체국으로 달려가 예금통장, 도장, 컴퓨터 사주, 그리고 아기의 백일을 축하한다는 손글씨 편지와 내 명함을 넣어 등기로 발송했다.

백일 오후, 나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바로 재일교포의 부인이었다. 백일 떡을 먹으러 오라는 전화였다.

1년 3개월 만에 맺은 열매, 얼마나 반갑고 달콤하던지…

이후는 순풍에 돛을 단 격이었다.

엉금엉금 기어다니던 대규가 첫걸음을 뗄 무렵.

회장님 가족과 우리 가족은 한 가족처럼 가까워져 있었다.

주말마다 회장님과 내가 바둑을 두고 골프연습을 하느라 두 가족이 모여 귀여운 대규의 재롱에 빠지다 보니 내 쌍둥이 딸들은 회장님의 큰 딸과 친구가 되어 같은 초등학교를 함께 다니고, 내 집사람도 회장님 부인과 친구가 될 정도였다.

회장님께서는 나를 때로는 동생처럼, 때로는 아들처럼 챙겼다.

영업 실적…

골프…

등등

나의 은행생활에서 어느 하나 회장님의 은혜가 닿지 않은 게 없었다.

심지어 나의 노후까지 염려하셨을 정도였으니…

 

“세라 아빠가 백일 때 뽑아 준 대규 사주가 우째 그리 딱 맞는지 모른다.” 라는

엄마 말씀처럼 바르고 건강하게 잘 성장해 멋진 모습으로 입장하는 신랑 대규.

회장님과 내 인연의 연결고리였던 대규가 장가가는 날인데…

‘오늘 같이 좋은 날’

‘회장님께서도 아들 옆에 계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安時煥 회장님이 무척 보고 싶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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