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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을 위하여...

북한산 산행

2016. 9. 11.(일요일)

경남상고(현 釜慶高)를 1974년에 졸업한 재경 동기들의 소모임인 '26산악회'에서 산행하는 날.

매달 두 번째 일요일에 관악산과 북한산을 번갈아 오르는데, 이번 9월달은 북한산 차례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불광역에서 만나 올랐었는데, 이번의 집결장소는 구파발역 1번 출구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몇 달을 빠졌던 나는 이번엔 꼭 동참하겠다고 약속을 했었으니….

 

시간이 넉넉하리라 생각하면서 오이를 큼직하게 썰어 넣은 배낭을 메고 8시 30분쯤 집을 나섰다.

양재역에서 3호선 지하철을 타고는 도착예정 시간을 확인했더니 집결시간인 10시 도착이 빠듯할 것 같았다.

불광역을 지나고 연신내역을 지났다. 다음역이 바로 구파발역이다.

아니, 이럴 수가…

구파발역까지 100여 미터를 앞두고 갑자기 지하철이 섰다. 잠시 대기 중이란다. 

안그래도 마음이 급한데…

2∼3분을 기다렸을까? 지하철은 다시 출발했다.

역에 내리자마자 인파를 뚫고 날 듯이 계단을 올라 출구에 나갔지만 시계바늘은 10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추석명절을 코 앞에 둔 일요일이라 참석한 친구들은 평소보다 조금 적은 편이지만, 권봉기 재경 동기회장과 송병철 산악대장을 비롯해 계종걸, 김석진, 김영문, 김귀동, 이홍희, 이종성, 최동효 등 산을 엄청 좋아하는 친구들은 대부분이 참석해 오랜만에 동행하는 나를 반겨 주었다.

30여 분 동안 시내버스를 타고 도착한 북한산성 입구.

우리들의 산행은 시작되었다.

북한산의 짙푸른 녹음은 아직 여름이라 우기는 듯 하지만, 높고 파란 9월 하늘은 가을이라 말하고 있었다.

산길 입구에서 커다란 입석 미륵불이 온화한 모습으로 등산객을 반겼다.

여기저기서 활짝 핀 산꽃들도 우리를 반겼다.

조금 더 오르자, 길가 곳곳에서 고향의 산에 올랐었을 때 여러 번 보았던 나무 무덤과 비슷한 것들이 눈에 띄였다.

고향 산에서 본 나무 무덤은 재선충에 감염되어 말라 죽은 소나무를 잘라 약품처리한 다음 훈증을 위해 두툼한 청색비닐로 꽁꽁 싸매고는 비닐에 약품처리한 날짜를 적어 놓았었던데, 이곳엔 아무런 표시도 없는 투명비닐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찟어진 비닐 사이로 보이는 건 빼곡히 쌓여 있는 기다란 참나무 토막들.

표고버섯 농장에나 가 있어야 할 참나무 토막들이 비닐 속에 쌓여있는 걸 보니 마음이 착잡했다.

언젠가 뉴스에서 보았던 '참나무 마름병'이 북한산까지 덮친 모양이었다.

지구 온난화로 우리 한반도의 기온이 아열대기후로 높아지면서 소나무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고 하던데, 오래지 않아 소나무가 자랄 수 없는 땅이 된다고 하던데, 참나무에까지 몹쓸 병까지 덮치다니…. 

이러다가 삼천리 금수강산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는 소나무와 참나무들이 몽땅 사라지는 건 아닌지 염려되었다.

'참나무 마름병'은 참나무에 기생하는 벌레가 참나무에 엄청난 구멍을 뚫고 살기 때문에 참나무가 말라 죽는 병충해란다. 이를 구제하기 위해서는 감염된 참나무를 잘라 약품처리를 한 다음 비닐로 덮어 훈증해야 한단다.

그런데 처리가 너무 허술해 보였다.

이렇게 해서야 약을 치고 훈증하는 효과가 있을 리 만무한데…

곳곳에 보이는 참나무 무덤의 비닐이 대부분 찟어져 죽지 않은 벌레들이 얼마든지 기어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참을 올라가다 쉼터에서 잠시 숨을 돌리는 시간.

몇 알의 포도와 수원에서 참석한 친구가 나눠주는 한 봉지의 홍삼진액으로 원기를 회복하고 다시 Go,Go∼

중성문(中城門)을 지나 조금을 더 오르자 계곡 옆에 날렵하면서도 아름다운 정자가 나타났다.

그다지 오래 되어 보이지 않는 정자에는 산영루(山映樓)란 현판이 걸려 있었다.

산영루(山映樓)는 무슨 누각일까?

계곡 건너편 바위에 큼직하게 새겨진 글씨가 한눈에 들어왔다.

'金聲根(김성근)'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이길래…

산영루를 지나자마자, '북한산성 비석거리와 민영휘의 선정비'라는 안내 표시판이 보이면서 왼쪽 바위 언덕 위에는 많은 비석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이곳을 비석거리라 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본 몇 개의 비석 모두에는 '총융사(摠戎使)', '애민(愛民)', '선정(善政)'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었다.

이 비석들의 주인공들은 모두가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어질게 다스린 벼슬아치였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총융사(摠戎使)'는 어떤 관직일까 궁금해졌다.

또, 이 선정비들은 누가 세웠는지도 궁금했다.

오늘날에도 국민들이 선정비를 세우고 싶어할 만한 정치인들과 관료들이 좀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민영휘의 선정비'라니…

민영휘는 일제 강점기 때에 국내 제일의 부자 중 한 명으로 대표적인 친일파였는데…

 

조금 더 오르다 잠시 휴식 취한 다음 또 오르고…

대동문을 1km 가량 남겨두고 자리를 깔자마자 친구들은 배낭에 넣어 온 먹을거리를 쏟아냈다.

산행 때마다 삶아 오는 산악대장의 맥반석 계란을 비롯해 포도, 바나나, 오이 등등 푸짐했다.

포도를 가져 온 친구가 사돈이 포도를 보냈더라면서 자랑을 하자, 한참 동안 여기저기서 사돈이야기, 며느리이야기, 사위이야기, 손주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우리 나이가 벌써 이렇게 된 것이었다. 

너무 멀리 지내서도 안 되지만, 너무 가까이 지내서도 아니 된다는 옛말이 있을 만큼 어려운 게 사돈지간인데, 사돈과 잘 지내는 친구들이 대견스러웠다.

그래서일까? 친구의 포도는 유난히 달콤했다.  

한여름 못잖게 땀을 흘리며 산에 올라 먹는 과일 맛.

더구나 오랜 친구들과 세상이야기를 나누며 먹는 과일 맛이란…

 

대동문 안쪽에서 한 컷의 기념사진을 찍고는 곧바로 하산.

계곡의 맑은 물을 그냥 지나칠 리 없는 친구들.

한 친구가 등산화를 벗고 발을 담그자 다른 친구들은 아예 웃통까지 훌러덩

맑디 맑은 계곡물은 정말 시원했다. 

시원한 계곡물은 산행의 피로를 씻어주고, 일상의 스트레스까지 털어 주었다.

 

다시 중성문을 지나 산행을 시작했던 곳으로 원위치.

점심을 겸한 뒤풀이가 남았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가족들과 손자의 세 번째 생일파티 약속이 있어 서둘러 자리를 떠나야만 했다.

적잖은 아쉬움이 남았지만, 오랜 친구들과의 북한산 산행은 무척 즐거웠다

언제나 그랬듯이 유익하고 행복한 산행이었다. 

 

 


 

 

 

 

-산영루(山映樓),-

산 그림자가 계곡물의 수면에 비치는 곳이라 하여 산영루(뫼山,비칠映, 다락樓)란 이름이 붙었단다. 고려말 이전부터 있었으면서 여러차례 중수를 거친 이 누각에는 조선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 등 당대 많은 지식인들이 이곳을 찾아와 아름다운 시문을 남기기도 했단다. 하지만 1925년 대홍수로 유실되어 주춧돌만 남았을 뿐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으나, 2015년 고양시의 역사문화복원사업을 통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단다.

 

 

산영루 계곡 건너편 바위에 큼직하게 새겨진 글씨가 한눈에 들어왔다.

 

'金聲根(김성근)

조선말기의 문신으로 정치인이자 성리학자로 청렴결백하고, 뛰어난 서예가였단다.

아뿔싸! 그런데 그가 일제 강점기에 고위 관료를 지낸 친일파였다니…  

 

 

-'총융사(摠戎使)-

총융사는 조선후기 5개의 중앙군영(五군영) 중의 하나로 인조 2년에 한양의 외곽인 경기일대의 경비를 위해 설치된 총융청(摠戎廳)의 수장으로 '관찰사'와 똑 같은 종2품의 벼슬이란다. 그런데 총융청이 설치된 이유를 찾아보니 내게는 슬픈 역사였다. 총융청이 생긴 건 인조임금 때 일어난 '이괄(李适)의 난' 때문이란다. 500년의 조선왕조 역사상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 때문에 임금이 수도 한양을 버리고 도망간 사례는 '이괄의 난'이 유일하단다. 그래서 조선정부는 도성(都城)을 지키기 위한 외곽 수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던 모양이다.

역적은 三族을 멸한다 하지 않던가.

始祖로부터 17世孫이 되는 이괄의 쿠테타 실패로, 고려조부터 조선중기까지 최고 명문가 중 하나였던 우리 고성이씨(固城李氏)는 졸지에 반역자의 가문이 되어 된서리를 피할 수 없었으니…

 

 

 

북한산성 비석거리에는 26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대부분이 총융사의 애민선정비란다.

 

 

-민영휘의 선정비-

이 비석이 1891년 북한산성 관리기관인 경리청의 수장이었던 經理使  민영휘(당시 이름 민영준)의 선정비다.

 

안내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비석은  파손된 후 오랫동안 방치되다 국민신문고 민원조치 일환으로 2014년 12월 정비하게 되었습니다.

민영준(1852∼1935) ; 1901 민영휘로 개명함. 1910년 국권을 빼앗긴 이후 일본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고, 일제강점기 국내 제일의 부자 중 한명이라고 합니다. 그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 및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민영휘는 조선말기엔 예조판서, 공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 지금의 장관급 자리를 수 차례나 지냈고, 대한제국에서도 육군부장, 헌병대 사령관, 호위대 총관을 지낸 고위 벼슬아치였음에도 불구하고, 국권피탈에 앞장선 대가로 1910년 10월 일본정부로부터 '자작'이란 작위를 받았으니 격분한 국민들이 부관참시를 하듯 그의 선정비를 파내어 두 동강내면서 조금이라도 분을 삭히지 않았을까 싶다. 

 

 

 

(대동문을 등지고…)

 

 

 

 

 

 

(친구들의 뒤풀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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