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방

[수필] 종친회 감투

 

종친회 감투

 

 

이 석 도

 

 

   “아재, 참판공파 부회장 좀 맡으소.”

나이는 나보다 많지만, 항렬이 아래인 서울종친회장이 전화를 걸어 한 말이었다. 정년퇴직을 앞두고 시간에 여유가 좀 생기자 이런저런 모임에서 감투를 안기려 했지만, 그때마다 핑계를 대며 용케 잘 버텨왔는데….

   종친회의 일을 맡기에 아직은 어리고, 바빠서 할 수 없다며 완곡히 사양했다.

   그러나 회장은 내가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할 말을 던졌다.

   “아재, 종친회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소. 그래도 아재는 옛날에 종친회 덕을 많이 봤다면서요. 그랬으면 이제는 은혜 갚을 줄도 알아야지.”

   그러고는 노인들만이 찾는 종친회를, 나와 함께 젊은 세대들도 참석하는 모임으로 활성화시키고 싶다며 감투를 씌우고 말았다.

   이십 수 년 전 분당 신도시 개발이 한창일 무렵, 성남시 인근에 있던 우리 문중의 선산이 신도시 개발 예정지에 포함되면서 선조들의 산소를 다른 곳으로 이장하면 큰 금액의 보상금이 나오게 되어 있었다. 이때 몇 대째 선산의 산지기로 살았던 한 종친의 자손이 그 산은 문중의 땅이 아니라, 등기상 명의자인 자신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사유지라 주장하며 보상금을 독차지하겠다고 나섰다. 산소를 옮길 새로운 선산을 물색하면서, 보상금으로 종중 회관을 설립하려던 문중에서는 난리가 났다.

   결국 소송까지 갔다. 재판이 열릴 때마다 선조의 불천위 제사를 지내는 대묘(大廟)가 있는 내 고향의 어르신들은 버스를 대절해 천 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법정으로 달려갔다. 수백 년 동안 내려온 갖가지의 문중 서류를 제출하고, 해마다 지내는 묘사를 법관들에게 보여주면서 재판에 응했다.

   마침내 선산은 세종조에서 정승을 지낸 선조가 불천위와 함께 하사 받았다는 족보의 기록이 인정되어 문중에서 보상금을 수령했다. 그 보상금을 예금으로 유치한 나는 그해 은행에서 예금유치 유공 직원으로 표창을 받았었다.

   몇 달 만에 만난 회장은 종친회 이야기를 하면서 열변을 토했다.

   전국 각지에서 농사를 짓다가 상경한 사람들이 모여 서울종친회를 결성하던 시절. 종친들은 서로 모르면서도 시조 할아버지가 같다는 이유 하나로 진한 유대감을 가지고 종친회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단다.

   지금도 어르신들은 통성명을 하거나 인사를 받을 때는 의례히 관향을 물어, 성씨가 다르면 서로 상대방 문중의 훌륭한 조상을 추모하는 이야기로 덕담을 나누지만, 처음 보는 얼굴일지라도 본관이 같으면 파(派)와 세수(世數)를 물으며 마치 집안 식구라도 만난 듯 반기곤 한단다.

   그러나 산업화 시대로 치달으면서 달라졌다며, 물질 위주의 사고와 개인주의가 팽배해진 반면 정신적인 가치는 날로 황폐화하면서 종친회의 결속력도 쇠락해졌단다. 요즘은 자신의 파와 세수는 물론 심지어 본관조차 모르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며, 세월이 갈수록 조상과 효에 대한 관심이 멀어질 뿐 아니라, 역사공부조차 등한시하는 풍토가 만연해지고 있단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우리 국민이라면 우리 역사를 공부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자신의 뿌리와 자신의 조상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부터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게 바로 역사공부의 시작이 아니겠느냐며 한숨지었다.

   근본과 조상의 은덕을 잊은 채, 직장 일에만 매달려 살았던 나를 두고 하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아버지로부터 문중의 역사와 선조들의 행적을 들을 때마다 한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버렸던 일들을 후회하면서 종친회장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노소 종친들 간의 가교 역할을 맡기며 내게 씌워진 감투. 이 감투가 도깨비감투이면 좋겠다. 종친회에서 멀어진 젊은이들이 종친회를 다시 찾게 만들 수 있게. 그러기에 앞서 조상과 효를 잊고 지낸 내 자신을 숭조상문(崇祖尙門)할 줄 아는 인간으로 만드는 마법의 감투가 되어 주었으면 더 좋겠다. (2014.2.25.)

 

* 불천위(不遷位)의 뜻: 큰 공훈이 있어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神位)).

* 숭조상문(崇祖尙門)의 뜻: 조상을 우러러 공경하고 문중(門中)을 위함.

 

'수필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필] 글 쓰는 즐거움  (0) 2014.11.05
[수필] 50년 후의 세상  (0) 2014.10.31
[수필] 쌀 포대를 열면서  (0) 2014.10.29
[수필] 목화솜과 빨간 거위  (0) 2014.10.27
[수필] 내 나이가 어때서  (0) 2014.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