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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방

할아버지와 손맛

 

 

(28)[초고: 2013.12.24.]

     [퇴고: 2014.1.24.]

할아버지와 손맛

이 석 도

‘맑은 소고기 무국’을 끓여 볼 요량으로 양지머리를 사들고 퇴근했다. 레시피를 읽으면서 소고기는 도톰하게 썰어 참기름으로 볶아 두고, 무를 얇게 썰고 있으니, 나박썰기를 배우던 작년 봄 ‘아버지 요리교실’이 생각났다.

 

스무남은 명의 중년 남자들이 매주 한 번씩 모여 밥을 짓고 몇 가지의 요리를 배운 다음, 반찬을 만들어 식사를 하고 설거지까지 하는 꽤 재미난 수업이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아버지들의 칼질이 처음에는 너무 서툴어 무섭기도 했지만, 한 달쯤 지나자 제법 익숙해졌다. 딸 또래의 여선생이 조리용으로 가져온 정종을, 자신이 만든 요리를 안주 삼아 몰래 홀짝거리는 할아버지의 표정은 영락없이 개구쟁이 학생의 모습이었다.

요리 선생의 시범이 끝나면, 레시피를 따라 재료를 손질하고 ‘몇 큰 술, 몇 작은 술’ 세며 계량한 양념을 넣으면서 요리를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요리를 집에 가져가면 집사람은 이제 마음놓고 친구들과 여행을 다녀도 되겠다며 무척 좋아했다. 평소 라면밖에 끓이지 못하던 내가 ‘요리에 소질이 있나 보다’ 싶을 만큼 맛이 좋을 때도 있었다. 야채 채썰기도 배우고, 칼질도 제법 늘었다. 3개월 과정이 끝날 무렵엔 양파에도 암수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고, 레시피만 있으면 무슨 요리든지 다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요리에 자신만만하던 때, 하루는 손자에게 요리 솜씨를 자랑하고 싶었다. 집사람이 모임에 가고 없던 날, 인터넷을 검색해서 ‘닭다리살 구이’ 레시피를 출력하고 닭다리를 사왔다. 뼈를 발라낸 다음 밑간을 하려고 정종과 필요한 양념을 찾았지만, 소주병에 든 기름이 참기름인지, 들기름인지도 구별할 수 없었다. 레시피를 한 줄 한 줄 되풀이해 읽으며 야채를 썰고, 양념을 넣어 닭고기를 볶았다.

요리가 완성될 무렵, 모임에서 돌아온 집사람은 갖가지 야채와 각종 양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난장판이 된 부엌을 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엄청 비싼 요리를 만드시네, 이걸 다 샀어요? 정종 말고는 다 있는데…”

어린이집에 갔던 손자가 돌아왔다. 맛있게 먹으리라 기대하며 닭다리살 요리를 한 접시 내놓았다.

닭고기를 한입 집어넣던 손자는 “아이 짜” 하며 뱉어버리고는 더 이상 먹으려하지 않았다. ‘애써 만들었는데…’ 좀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집사람이 맛을 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맛도 그렇지만, 짜긴 좀 짜네…”

아내는 내가 만든 요리에 밥을 넣고, 몇 가지 양념을 척척 뿌리더니 볶음밥을 만들어 내놓았다. 그러자 손자가 맛있다며 한 그릇을 다 먹기에 나도 먹어보았다. 손자가 잘 먹을 만했다. 조리법대로 양념을 넣고, 적힌 대로 시간 맞춰 불에 볶으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모양은 그럴 듯했지만, 맛을 내기는커녕 간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한 셈이었다. ‘음식 맛은 손맛’이라는 말이 떠오르고, 하찮아 보이던 푸성귀도 엄마의 손만 닿으면 맛난 반찬이 되어 밥 한 그릇을 뚝딱하게 했던 시절이 생각났다.

 

엄마들은 눈대중으로 양념을 넣고도 조물조물하면서 만드는 맛난 요리를, 나는 배운 지식을 총 동원해도 잘 되지 않은 걸 보면서, 흉내는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솜씨와 손맛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레시피에는 적혀 있지 않은 ‘손맛’, 아니 문자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 ‘손맛’은 어쩌면 사랑과 정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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