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당 종소리
이 석 도
“따르릉 따르릉…”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고도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종이 울렸다면 듣지 못할 리가 없는데…’
고향에 내려와 해거름의 예배당 종탑을 보면서 종소리를 들은 지 꽤 오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은은하게 울리는 예배당 종소리가 듣고 싶어서 핸드폰 알람을 새벽 4시에 맞추어 두고 잠자리에 들었던 것이다.
동네에서 가장 높이 솟은 종탑에서 울리는 그 시절의 예배당 종소리는 알람이나 다름없었다.
새벽 종소리가 들려오면 아버지들은 부리나케 일어나 소죽가마에 불을 지피고, 어머니들은 물동이를 이고 마을에 몇 개뿐인 공동 우물에 나가 물을 길어 오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언젠가 내가 태어난 시간을 궁금해 어머니께 여쭈었더니 대답은 이랬다.
“예배당 종소리가 들리고 나서 좀 있다가 너를 낳았단다.”
당시엔 예배당에서 04시 30분에 종을 쳤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나의 출생 시간을 5시부터 5시 30분 사이로 여기게 되었다.
내 어린 시절, 고향의 교회에는 주일이면 이웃 마을의 신도들까지 모여들어 빈자리가 거의 없을 만큼 붐볐다.일요일은 내 또래의 개구쟁이들에게 제일 신나는 날이었다. 예배가 한창일 때쯤 예배당에 몰려가 양철지붕 위에 돌을 집어던져 시끄럽게 만들고, 종탑에 묶인 밧줄을 풀어 잡아당겨 종을 쳐서 예배를 방해하기도 했다. 신도들이 나오면 “예배당에 갔더니 눈 감아라 해놓고, 내 신 훔쳐가더라”라는 해괴망측한 노래를 부르며 도망치곤 했었다. 그래도 크리스마스만 되면 어김없이 교회에 가서 눈을 뜬 채 기도 흉내를 내고, 찬송가와 캐럴을 부르면서 마을을 도는 성가대를 졸졸 따라다니며 사탕을 얻어먹곤 했으니….
햇살이 더 뜨거워지기 전에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아담한 양철지붕의 예배당이 있었던 자리는 몇 해 전 교회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새로 지어져 한층 웅장해진 교회 건물 안에서 주일 예배가 한창인 듯 찬송가가 흘러나왔다. 안쪽은 잘 보이지 않고 현관 밖 신발장에는 채 열 켤레도 되지 않는 어른 신발들만이 반듯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교회 마당의 높다란 종탑에는 여전히 예전의 그 종인 듯 보이는 큰 종이 달려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잡아당기곤 했던, 종을 칠 때마다 잡아당겨야 하는 기다란 밧줄은 보이지 않았다.
개구쟁이가 할아버지 되는 동안 고향에서도 달라진 것은 예배당뿐이 아니었다.
개구쟁이들이 많아 뛰놀기 비좁았던 골목길이 지금은 한적하기 그지없고, 달빛 없는 그믐이면 등불 없이 다닐 수 없었던 골목길이 지금은 길목마다 가로등이 보름달처럼 밝히고 있었다. 해질녘 온 동네 굴뚝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하얀 연기는 전기밥솥과 보일러가 쫓아낸 지 오래고, 새벽마다 엄마들이 물동이를 이고 찾았던 동네의 우물들은 수도관이 묻히고 나서는 하나 둘씩 메워져 없어졌다. 아이들이 구슬치기랑 돌치기를 했던 마을회관 앞마당은 푸른 잔디로 덮여 있고 회관 안에서는 자식들 모두를 도회지로 내보내고 혼자 지내는 예전의 엄마들이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 삼삼오오 모여 화투로 외로움을 달래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없는 핸드폰을 수시로 들여다보면서….
‘댕그랑 댕그랑’
온 동네에 울려 펴지는 예배당의 종소리를 듣고 싶은 건 나만의 욕심이었을까?
지금의 고향엔 예배당의 종소리가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것 같았다.
시계와 자명종이 핸드폰에 들어 있을 뿐 아니라 종소리가 울리면 엄마들이 물동이를 이고 찾아가던 우물도 없고 새벽부터 쇠죽을 끓여 보살펴야 하는 소들도 없고 가족들마저 다 도회지로 다 떠났으니... 울리지도 않는 핸드폰을 품에 안은 채 멀리 사는 자식들을 그리워하며 밤잠을 설치는 할머니들이 새벽잠이라도 푹 주무실 수 있게 지금처럼 새벽종은 울리지 않는 게 오히려 좋을 것 같았다.
대처에 나가 사는 자식들은 부모님을 자주 찾아 뵙지 못하는 대신, 웃음소리와 손자들 뛰노는 소리로 외로움을 씻어 드리지는 못하는 대신 새벽 종소리가 사라진 고향의 부모님께 전화벨 소리라도 자주 들려드렸으면 좋겠다. (2013.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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