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5일
아침부터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고
세찬바람이 불어 제법 쌀쌀한 날씨였다.
화요일이라 수필창작 수업이 있는 날이다.
수업 전에 만나 늘 같이 점심을 먹던 고향친구 상진이는
골프모임에 갔으니 나 혼자 점심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친구는 좋아하는 수필수업까지 빼먹고 골프를 갔는데,
날씨가 화창했으면 좋으련만 가을비에 바람까지…
여성 한 분이 신규회원으로 들어왔는데
詩로 등단한 시인이란다. 소설을 쓰고 싶어서
글 공부를 준비하던 중 교수님의 존함을 듣고 등록했단다.
첫 수업에 오면서 작품을 써왔다. 대단하다.
존함을 듣고 찾아왔다는 신규 회원의 말에
신이 난 교수님은 평소보다 수필창작을 열강하시고는
회원들의 작품에 대한 話評이 시작되었다.
내 작품은 9월 10일에 제출한 「폐교」인데,
2012년 봄 폐교한 내 고향의 초등학교에서 지난 5월
총동창회에서 치룬 성대한 주민잔치의 느낌을 담은 글이었다.
먼저 두 고참의 평이 있었는데, 한 분은 결말이 마땅찮다고 했다.
자신이 쓴다면, 결말을 시대의 변화에 따라 폐교는 되었지만
졸업생들이 훌륭히 자라 지역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으니
위안이 되는 점을 강조하겠단다.
나머지 한 분은 서정적인 내용이 좋다며
잘 쓴 수필인데, 부정적인 의미가 담긴 '폐교'라는
제목을 바꾸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교수님의 話評이 있었다.
* 몇 군데 띄어쓰기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했다.
* 매전초등학교 이름을 쓰지말라,(매전초등학교 동판→학교이름 동판)
* 결말부분의 한 문장은 지우는 게 좋겠다.(농촌의 성쇠…)
* '폐교'란 제목은 그다지 좋다할 수 없다.
* 맨 앞 7줄은 없어도 충분하지만, 넣고 싶으면 막연하니 좀 더 구체화 할
필요가 있다, 재료(소재)는 좋은데 요리가 덜 되었다.
교수님과 두 회원의 의견을 참고해 제목을 바꾸고 퇴고를 마쳤다.
(수필 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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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를 마친 작품)
모교여 안녕…
이 석 도
(⑱ 초고, 2013.9.10. 퇴고, 2013.10.16)
대구에서 차를 타고 남쪽으로 한 시간 남짓 달려 야트막한 고갯길에 올라서면, 눈앞이 시원할 만큼 산골치고는 꽤 널찍한 들판과 한적한 농촌마을이 나타난다,
저만치 아래로 조그만 저수지가 있고, 마을입구에는 우람한 느티나무들이 있는 학교가 보인다.
일제 강점기였던 90여년 전, 시골의 아이들도 글을 깨우치고, 민족정신을 고취하려면 학교가 있어야 한다며 마을 어르신들이 십시일반 땅을 기부하고 돈을 모아 설립한 초등학교다. 내가 다니던 무렵에는 기와지붕이 아담한 단층 건물이었지만 전교생이 300명을 넘었고, 한창 많을 때는 600명이 넘기도 했으니 시골에서는 무척 큰 학교였다.
나와 우리 고향 사람들에게 학교는 어릴 때부터 배움터였고, 놀이터였다.
교사 뒤편의 연못과 도랑은 봄날부터 물놀이장이었고.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한여름의 쉼터였다. 교정 군데군데 감나무에 달린 홍시는 가을날의 간식이었다.
넓은 운동장의 높은 가을 하늘에 만국기가 휘날리는 운동회 날은 온 동네의 잔칫날이 되었다. 그 때의 나무 책상과 걸상은 왜 그리 크고 무겁던지, 교실 청소를 위해 걸상을 책상 위에 올려 교실 뒤쪽으로 옮기는 일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간혹 찾아가는 고향길 모교의 모습은 서서히 변해갔다. 아름드리 느티나무들이 우람함을 더해가는 동안 단층 기와였던 교사(校舍)는 사라지고 콘크리트 2층 건물이 들어섰다. 아무리 달려도 끝없게 느껴졌던 운동장은 그대로인데도 갈 때마다 조금씩 작아지는 듯 느껴지더니, 언젠가 찾아간 운동장은 부잣집의 마당만큼 작게 보였다. 교실마다 빽빽하게 들어찼던 책상은 여남은 개로 줄어 있었고, 힘겹게 들어올렸던 걸상은 인형의자 마냥 작아져 한 쪽 엉덩이밖에 얹혀지지 않았다.
농촌 마을에 젊은이들이 사라진다는 뉴스가 한창일 때, 내 고향에서도 아기의 울음소리가 끊어졌다. 면(面) 전체에서 신생아가 한 명도 없는 해도 있었다.
오래 전 내 모교에서 독립해 개교한 인근의 초등학교가 몇 해 전에 폐교되면서 모교와 다시 통합됐지만, 전교생은 겨우 스무 명밖에 안 된다는 소식이 들려오더니…. 작년 봄, 마침내 우리 모교의 교문도 굳게 닫혔다. 전교생이 스무 명 남짓했던 모교는 면 소재지의 초등학교와 통합하면서 폐교된 것이다.
아직은 떼어지지 않은 교문의 학교이름 동판 아래에 세워진 까만 돌.
“1924년 9월 19일 개교하여 졸업생 4,207명을 배출하고, 2012년 3월 1일 폐교되었음. 경상북도 교육감”이 새겨진 까만 교적비는 마치 묘비처럼 보였다.
지난 5월, 굳게 닫혀 있던 교문이 활짝 열렸다. 20대부터 80대까지의 많은 동창생들이 모여 운동장 여기저기에 웃자란 잡초를 뜯어냈다. 하늘에는 가득히 만국기를 내다 걸었다. 북소리와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졸업생들이, 동문이기도 한 부모와 형제 그리고 친척 등 일곱 동네 주민들을 모시고 잔치를 벌인 것이다.
이날의 잔치는 구십여년 동안 수천 명의 동량들을 키워낸 모교, 소년기의 추억을 가득 담고 있는 모교의 폐교를 아쉬워하며 서로를 위로하는 위로연이었다.
우리 고향이 많은 젊은이들이 찾고 정착하는 농촌, 아기 울움소리가 끊이지 않는 젊은 농촌이 되어 활기를 되찾길 기원하는 기도장처럼 보였다.
어딘가에 만물의 생사윤회(生死輪廻)를 관장하는 신(神)이 있다면 운동장 가득히 울려 퍼진 함성을, 우리 모교가 다시 교문을 활짝 여는 날이 어서 오기를 염원하는 기도소리로 들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