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5. 17. 수요일
은근히 기다렸던 셋째 수요일
'어떤 모습일까?'
'이제는 괜찮을까?'
머리가 어지러울 만큼 고약했던 15여 년 전의 기름 냄새를 떠올리며 집을 나섰다.
너무 서둘렀나 보다. 걸어서도 이삼십 분이면 되는 거리를 지하철을 탔더니 국립 외교원 앞 집합장소는 조용했다.
하지만 모두가 오늘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7시 30분을 지나면서 금방 집합장소는 왁자지껄해지고···
8시가 살짝 지날 무렵엔 우리 모두의 눈에 익은 두 대의 우리은행 버스가 헐레벌떡 달려오고···
경부고속도로와 서해고속도로를 거친 우리 버스가 태안반도에 들어서자
차창 너머로 보이는 찰랑찰랑 물을 가득 담은 채 모내기 기다리는 무논은 정겹다 못해 눈물이 날 지경이었는데
어느새 내 안의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한 갑자 전으로 되돌아갔다.
만물이 푸르름을 더해가는 이맘 때면 아버지는 동네 어른들과 함께 날마다 지게를 지고
산에 가서는 풀을 베어 마른논에 뿌린 후 소가 이끄는 쟁기로 흙을 갈아엎고 찰랑찰랑 논물을 댔었지.
며칠 후엔 "이랴! 이랴! 워! 워!" 써레질하시면서 소를 달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에 울려 퍼지고
또 며칠 후면 나는 못줄을 잡은 채 새참을 머리에 이고 오실 엄마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산자락마다 하얗게 활짝 핀 아카시아꽃들이 꿀 내음을 내뿜고 있는
고속도로와 국도를 꼬박 3시간 달려 도착한 태안 솔향기길 1코스 출발점 만대항
'망개나무'로 더 많이 알려진 '청미래덩굴'
잎에 방부제 성분이 있어 잎으로 싸면 쉬이 상하지 않는다며 예전엔 이 잎으로 떡을 감싼 망개떡이 유명했지만
요즘은 뿌리가 해독작용, 심혈관 건강 성기능 강화 등에 좋은 한약재라며 '토복령'이란 멋진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데다 나이 드신 분들이 즐겨 보는 '나는 자연인이다'란 TV프로에서도
수시로 제법 귀한 약재 대접을 받는 통에 이러다 멸종되는 게 아닐까
걱정되었는데 이곳 솔향기길 주변에는 꽤 많이 있었다.
태안반도의 후망산도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하고 싶었나 보다.
부처님 오신 날을 열흘 남짓 앞두고 산자락 곳곳엔 이처럼 둥굴레 줄기마다 하얀 연등이 달려있었다.
입이 심심했던 차에 잘됐다 싶은 데다 야생 둥굴레의 생뿌리 맛이 궁금해 한 포기를 뽑아
통통한 뿌리줄기를 흙만 털어내곤 꼭꼭 씹었다. 생각보다 맛있었다.
약간의 달콤함과 쌉싸름함이 잘 어우러진 싱싱한 뒷맛은
차로 마시는 둥굴레와는 완전히 다른 맛이었다.
눈이 시리도록 맑디맑은 태안 바다를 바라보면서 솔향기길을 걷자니 또다시 15여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독산동 지점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2007년 겨울, '태안기름유출사고'가 발생하자 많은 다른 지점의 직원들과 함께
머리가 아플 만큼 기름악취 진동하는 현장으로 달려가 비닐 우의와 고무장갑을 착용하곤 부직포 등으로 바위,
돌멩이, 모래 등등에 엉겨 붙은 기름을 닦아내는 봉사활동을 했지만 원상회복까지의 세월이
짧게는 50년, 길면 100년 이상 걸린다는 뉴스에 얼마나 절망했던가···
그랬었던 태안반도의 앞바다가 15년 만에 이처럼 맑고 푸르다니···
이런 게 바로 기적이고 우리 韓民族의 저력이구나 싶었다.
1974년 한일은행 입행동기, 칠사회 친구들과 함께···
서해 바다와 함께 걸었던 10여 km의 솔향기길 1코스는 환상 그 자체였다.
2017년 혼자서 13일 동안 걸었던 속초에서 부산까지 해파랑길이 동해안 자전거 길의 여성스러운 길이라면
고도가 100m 남짓한 후망산의 자락이지만 스무고개를 하듯 수도 없이 오르내리는 솔향기길은
서울 둘레길의 9개 코스 중 난이도가 가장 높다는 수락산 코스보다 한 수 위로
울룩불룩한 근육이 꽤 잘 어울리는 남자의 길이라 해도 괜찮겠다 싶었다.
무엇보다 기름의 악취가 솔향기로 바뀌어 있어 좋았다.
'많은 사람들이 태안반도 솔향기길을 걸으면서
기적의 기운을 듬뿍 담아 갔으면···'
욕심이 절로 들었다.
게다가 최근 詩想이 떠오르지 않아 개점휴업 상태였는데
태안반도의 은은한 솔향과 바람이 실어 나르는 짭조름한 바다 내음 덕분에
아래의 拙詩(졸시) 한 수를 건졌으니 나에게 오늘은 행복 두 배의 날.
태안반도에서
돌담 이석도
해안 따라 솔향기길
아련한 냄새를 품고 있었다.
젖 빨면서 맡았던 엄마 향기
엄마가 밭일하면서 머리에 썼던
수건에서 나던 바다 향기
나뭇짐 지고 오신 아버지
어깨에서 나곤 하던 송진 내음
뙤약볕 김매고 오신 아버지
적삼이 풍기던 짠내
태안반도는 아버지
솔향기길은 엄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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