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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10.26사태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서울시내 곳곳에 장갑차와 중무장한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어 살벌하고 어수선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지 하루 하루가 불안하기만 하던 무렵. |
약 보름 후인 1979년11월11일 오후, 종로4가에 있는 동원예식장에는 두루마기 차림의 노인,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아낙들과 정장차림의 많은 젊은이들이 분주하게 모여든다. 3시 정각, 신랑이 씩씩하게 입장하고, 이어 사회자가 낭송하는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가 울려 퍼지면서 식장을 가득 메운 하객들 사이로 하얀드레스가 잘 어울리는 신부가 두루마기 노인의 손을 잡고 입장한다. 낮익은 주례는 혼인서약과 "이제 신랑 李○○군과 신부 朴○○양은...부부가 되기를 굳게...선포합니다."라는 성혼선언문을 낭독하고는 주례사를 시작한다. 요즘 예식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아무런 이벤트도 없지만 조촐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주례사와 인사가 끝나고, 들어올 땐 혼자였던 신랑이 신부와 팔짱을 끼고 온 세상을 다 얻은 듯이 환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면서 퇴장한다.
약 1년전, 동료 여행원의 소개로 만난 전남 고흥 태생의 처녀와 경북 청도 출신 총각이 첫 눈에 반한지 10개월만에 부부의 연을 맺는 결혼식장의 모습이다. 대통령시해사건으로 온 나라가 어수선할 때 였지만, 많은 친인척과 동료. 친구들의 축복속에 고향출신 국회의원 박권○씨의 주례로 빼빼로 데이(당시에는 빼빼로 데이란 용어가 없었지만...)에 백년가약을 맺는다. 신랑은 26살, 신부는 24세로 요즘이라면 애기 취급받을 어린나이다. 하지만 락교와 은행 동기들 중 가장 일찍 결혼한 축에 들어가니 당시로서도 빠르긴 좀 빠른 나이다. 덕분에 친구들보다 일찍 아이를 낳아 공부 뒷바라지까지 일찍 마쳐 IMF와 금융위기로 구조조정이 한창 심할 때 한결 어께가 가볍다. 더구나 50대 중반의 나이에 두 딸의 혼사까지 다 끝냈으니 이른 결혼 덕을 톡톡히 본 셈이라, 부러워하는 친구들이 적지않다. 신혼살림을 종암동에서 주택 2층의 절반(방1, 부엌)을 전세금 120만원으로 시작해 이듬해 8월에 보라와 세라를 낳고, 그해 연말에는 은행에서 지은 서초동 직원아파트를 분양받아 입주한다.
江山이 변한다는 10년의 세월이 세번 넘게 흐르면서 새신랑이 할아버지가 되는 동안 사진 속 70여명의 친인척 중 30여명이 세상을 떠났고, 사진속의 친구 중에도 여러명은 故人이 되었으니... 참으로 많은 변화다. 당시 한일은행 압구정동지점에 근무할 때 높은 건물이라고는 현대아파트 등 몇 개만 우뚝 서 있었다. 비오는 날엔 필히 장화를 신어야 할 만큼 진흙탕이었던 강남이 서울 최고의 번화가가 되었다. 결혼식에 참석하는 동료들의 축혼금은 2,000원 내지 3,000원 이었으니 화폐가치는 지금의 2∼30배는 되었던 모양이다. 결혼후 근무지를 따라 대구와 포항에 살기도 하면서 많은 세월이 흘렀고, 아이들은 자라 2007년과 2010년에 결혼하면서 우리 품을 떠났다. 어여쁜 새색시였던 집사람이 할머니가 되는 세월동안 기쁘고 좋은 날도 많았지만, 궂은 날, 슬픈 날도 적지않았다. 하찮은 일로 부부싸움을 할 때가 많았지만, 때로는 심각할 때도 제법 있었는데... 육십을 눈앞에 둔 나이가 된 지금에서야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닫는다.
지난 날엔 은행에서 스트레스가 쌓이면 집사람에게 풀려고 했었고, 무슨 일이든 잘 되지 않으면 만만한 아내에게 짜증을 부렸다. 늘 헛된 것을 쫒아 밖으로 나돌면서 가족의 소중함은 알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밖에서는 성실하고 부드럽다는 칭찬을 들으면서도 막상 가족들에게는 사랑을 표현할 줄 모르고 되려 늘 긴장하게 만들었다. 못난 내가 스스로 만든 틀에 갇혀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 힘들게 했다는 생각이 든다. 10년도 더한 지점장직을 연령제한으로 2009년부터 그만두고 임금피크직을 받아들였다. 아쉬움이 아주 없진 않았지만 영업실적이란 압박과 내부관리-직업특성상 전직원이 늘 돈과 관련된 일만해야 하기에 리스크가 많음-에서 해방되고, 그리고 불빛을 찾아드는 불나방처럼 金利따라 옮겨다니는 고객은 별난 비위까지 맞추기도 해야하는 고객관리로부터 벗어나면서 헛된 욕심만 버렸는데도 이처럼 머리가 맑아지고 눈앞이 환해질 줄이야... 현실을 받아들이고 주위를 살펴보니 가족이 보이고, 또 그동안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도 보였다. 특히 손자가 태어나면서 가족을 사랑하는 게 얼마나 즐겁고, 나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지 알게 되었다. 사랑은 쏟으면 쏟을 수록 많이 더 많이 생겨난다는 걸 느끼게 되고, 나의 정행(淨行)과 솔선(率先)이 신뢰를 낳고, 신뢰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또 사랑을 낳는 선순환(善循環)이 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오늘 2012년11월11일, 결혼 33주년을 맞아 오랜 세월동안 지아비로서 아버지로서 많이 아끼고, 많이 사랑하지 못했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반성하면서, 지금부터라도 33년전 오늘 주례앞에서 '어떤 경우라도 항시 사랑하고, 존중하며 어른을 공경하고 성실한 남편의 도리를 다 하겠다.'고 맹세했던 '혼인서약'을 꼭 지키리라 다짐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天兒 원준에게도 "할아버지가 우리가족 모두 더 많이 아끼고, 더 열심히 사랑할께..."라고 약속해야 겠다. |
(내 결혼식 청첩장 ―11월11일 11시에 결혼하고 싶었는데...)
(아버지 손잡고 입장하는 신부)
(동원예식장은 이제 없어졌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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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친인척 사진)
(신랑친구와 신부친구들)
(신혼여행을 다녀와 시골에서 폐백드리고 작은 동네잔치도...)
(결혼 30주년 때, 우리는...)
(그러고 보니 오늘은 2009.11.11. 태어난 뽀미의
세번째 생일이기도... 뽀미야! 생일 축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