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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여행, 여행, 등산...

이륙산악회 백두산 오르다.

 

 

    2017. 7. 6.(목요일) - 7. 9.(일요일)

     -첫날-

양재역에서 04시 25분에 출발한 공항 리무진 버스를 타고 도착한 인천국제공항 출국장.

6시가 가까워지자 약속 장소인 3층 F와 G카운트 사이로 친구들이 한 명씩 한 명씩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자녀들을 모두 결혼시키고는 수십 년 동안 살던 서울의 집을 그대로 둔 채 올해 초 부인과 함께 제주도로 거처를 옮겨 여유로운 삶을 즐기고 있는 친구와 인천에서 하던 사업을 몇 달 전에 접고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는 울산으로 내려간 친구까지 13명 모두가 정시에 모이자 인솔 가이드로 동행하는 박 사장이 이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오늘은 친구들과 백두산 여행을 떠나는 날.

지금은 釜慶高校로 교명이 바뀌었지만 부산의 옛 慶南商高 26회 졸업 在京 동기들 중 산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십수 년 전부터 이륙산악회를 결성해서는 매월 한두 차례 서울 근교의 산에 오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15년 4월 특별 산행으로 제주도의 한라산에 올랐었는데 얼마나 즐겁고 행복하던지···, 그때 하산하면서 한 친구가 다음 특별 산행은 우리 민족의 聖山인 白頭山에 한번 오르자는 제안을 하고 모두가 그 제안에 뜻을 모았으나 만 2년이 넘어 결실을 향한 여행이 시작되는 셈이다.

한라산 산행 時 등반대장이었던 친구가  2년 동안「백두산 여행 추진 위원장」이란 중책을 맡아 알맞은 경비에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여행사를 선정해 天池를 한 번만이라도 온전히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서파와 북파 코스로 두 번 오르기에 좋은 날씨의 택일, 여행 일정 등을 확정하느라 애를 많이 썼단다. 참여 예정 인원이 당초에는 16명이라 단독팀을 꾸리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부득이한 집안 사정으로 3명이 빠지게 됨에 따라 마음고생이 무척 컸을 것 같다.

공항에서 김밥으로 아침 요기를 했다. 그러자 산행 때마다 삶은 계란을 가져오는 등반대장은 이번에도 맥반석 계란을 꺼냈다. 요기 후 수속을 마치고 탑승구로 가던 중 아무것도 사 오지 말라는 집사람의 엄명(?)을 떠올리며 면세점을 지나치는가 했는데 잠시 후 내 발걸음은 어느새 돌아서서 홍삼제품을 파는 정관장 코너를 찾아가고 있었으니… 

탑승을 기다리면서 기념사진을 찍을 때였다.

그런데 이륙회 등반隊長이 배낭에서 뭔가를 꺼내지 않는가.

멋진 플래카드였다.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을 때 걸고 싶어 만들었단다.

준비성 대단한 친구…

 

 

 09시에 출발한 아시아나機는 2시간여를 날아 장춘 공항에 사뿐히 앉았을 때 현지시간은 10시 10분.

백두산을 관할하는 吉林省의 省都 장춘.

현지 가이드가 우리를 반겼다.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먹는 현지식의 점심.

보기에는 우리가 늘 먹는 요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가미한 향료는 좀 진한 듯…

 

 

 점심을 마치자 우리를 실은 관광버스는 달리기 시작했다.

산은 보이지 않고 지평선만 아득히 보이는 들판, 온통 초록이었다. 대부분이 옥수수란다. 끝이 없을 것만 같았다.

성실해 보이는 현지 가이드가 마이크를 잡고 우리말을 했지만 쉬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억양이어서 집중해야만 했다.

그는 32세의 젊은이였다. 아버지의 고향이 함경북도인 동포란다. 할아버지 때 두만강을 건너 중국 화룡시에 정착했다면서 자신이 어릴 때인 20년 전까지만 해도 북한 사람들이 중국 길림성의 동포들보다 잘 살았는데, 그때는 별 어려움 없이 두만강을 건너가서 북한의 친구들과 어울려 낚시를 하곤 했다면서 그 시절의 추억들을 하나씩 꺼냈다. 또 자신이 보고 들었던 북한 사람들의 궁핍한 삶과 오래전 언젠가 겨울 두만강에서 보았던 북한인의 비참한 죽음 등의 이야기와 여동생이 결혼해 살고 있는 남한에 드나들면서 본 남한의 자유롭고 윤택한 삶과 느낌 등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백두산 아래에서 사는 한족과 조선족의 생활상도 들려주었다.

가이드는 우리에게 참 좋을 때 왔단다.

예년의 지금쯤이면 한국으로부터 날아오는 정기노선의 비행기는 말할 것도 없고, 수 없이 내려앉는 한국의 전세기들이 쏟아내는 관광객들로 공항과 백두산 등산로가 붐벼 제대로 관광하기 힘들었는데, 사드 배치 문제가 불거진 이후론 전세기가 싹 사라져 한국 관광객이 많이 줄었는 데다 중국인들이 백두산을 많이 찾는 시즌은 열흘쯤 있어야 되기에 지금이 덜 붐비고 날씨도 졸아 딱 좋은 시점이란다.

그러면서 현지 가이드는 자신이 십여 년 가까운 세월을 가이드 생활을 하고 있지만 백두산 여행에서 天池를 제대로 보는 경우는 60∼70%도 되지 않는다면서 천지를 보느냐 못 보느냐는 전적으로 하늘에 맡겨야 된단다. 그래서 三代에 걸쳐 福을 지어야만 天池를 볼 수 있다는 말도 있단다. 그러면서 우리가 이틀에 걸쳐 서파와 북파로 백두산에 오르지만 두 곳 모두에서 천지를 온전히 보겠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라면서 마음을 비우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하긴 백두산이 어디 그냥 山인가? 우리 한민족의 聖山인데…

하루에 백 두 번씩 날씨가 바뀌기 때문에 백두산이란 농담이 있고, 백 번을 올라야 겨우 한두 번쯤 천지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백두산이란 우스개가 있는 데다, 실제로 20여 년 전 중국에서 권력 서열 일인자였던 강택민도 주석 시절 1994년 백두산을 개발했는데 이 무렵 몇 차례나 백두산에 올랐음에도 천지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달리는 버스 안에서는 페트로 만들어진 작은 소주병과 마른안주가 좌석을 오가면서 우리들의 고교 시절 추억들을 들추고, 인생과 삶의 이야기를 나누게 하고, 유수 정치인들의 이름도 오르내리게 했다.

5시간 반 동안 달린 버스가 마침내 멈추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달린 셈이다.

백두산 아래 시골 호텔에 여장을 푼 우리는 저녁 식사를 하고는 몇 달 전 첫 사위를 맞은 친구의 방에 모였다. 

술잔을 주고받았으며 우정을 쌓을 때 과자 등 여러 가지가 안주로 나왔다. 그런데 이 안주들은 모두가 몇 달 전에 결혼한 친구의 신혼 사위가 여행 떠나는 장인을 위해 마련한 것이라니 분위기와 술맛은 더 UP이 되고…

 

최칠수, 김영호, 계종걸, 이홍희, 김석진, 이풍규, 이석도

정승효, 권봉기, 장태황, 김영문, 신종진, 송병철

 

-둘째 날-

호텔 식당에서의 아침 식사로 둘째 날의 일정이 시작되었다.

아침 식사 후 버스를 타고 30여 분을 달려 도착한 백두산 서파의 山門. 

그런데…

곳곳에 '長白山(장백산)'이란 글자만 보일 뿐, 어디에서도 '백두산'이란 단어는 볼 수가 없었다.

백두산의 이름이 무려 8가지나 되고, 중국에서는 長白山이라 부른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 한민족에게는 민족과 국가의 발상지이자 고조선 이래 부여, 고구려, 발해 등이 기원을 둔 산이 바로 백두산이며, 한글을 익히고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우리 민족의 땅으로 알았던 백두산인데 절반은 중국 땅이라니…

백두산의 절반은 언제부터 중국 땅이 되었을까?

 

 

  -백두산-
높이 2,750m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중국과 국경을 이룬다. 북동에서 남서 방향의 창바이 산맥과 북서에서 남동 방향의 마천령산맥의 교차점에 위치하는 화산이다. 백두산의 중앙부에 천지가 있으며, 그 주변에는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회백색 봉우리 16개가 천지를 둘러싸고 있다. 이 가운데 6개 봉우리는 북한에 속하며, 7개는 중국에 속하며, 3개는 국경에 걸쳐 있다. 백두산 중앙부는 넓고 파란 호수 주변에 회백색 산봉우리들이 둥그렇게 둘러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백두산에 대해 기록한 최초의 기록에서는 이 산을 불함산으로 불렀으며, 이후 기록에는 단단대령·개마대산·태백산·장백산·백산 등으로 나타난다. '백두산'이라는 명칭이 처음 기록한 문헌은 〈高麗史〉다.
백두산이 분할된 역사를 살펴보면 이렇다.
淸나라에서 1712년 일방적으로 청과 조선의 국경을 표시한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는데, 이후 청나라에서는 이 정계비에서 국경의 기준으로 삼은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해석해 간도일대를 자기들 땅으로 주장하면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영토분쟁을 하고 있던 중, 1909년 淸.日 간 체결된 간도협약으로 두만강이 국경으로 결정되면서 지금의 백두산은 천지까지 분할되어 북쪽 2/5는 중국측, 남쪽 3/5는 북한측에 속한다.

 

위에 나오는 백두산정계비에는

"大淸 오라총관 목극등은 변방의 경계를 조사하라는 천자의 명을 받들어 여기에 와서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이요, 동쪽은 토문강이다. 그러므로 분수령에 돌을 새겨 기록하노라. 강희 51515일 필 첩식 소이창, 통관 이가, 조선 군관 이의복, 조태상, 차사관 허량, 박도상, 통관 김응헌, 김경문"이라 새겨졌을 뿐조선측의 접반사 박권의 이름이 빠져 있었는데, 이 이유는 당시 接伴使 박권은 고령을 핑계로 백두산에 오르지 않고 군관과 역관만 딸려 보냈기 때문이란다.

ㅉㅉㅉ…. 이 중대한 나라 일을 이렇게 소홀히 취급했던 것이다.

접반사가 백두산에 올라가서 나라 일을 제대로만 처리했더라면 북간도 땅도 지금은 북한 땅일 텐데

! 아쉽다(접반사란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임시직 벼슬로 정 이상에서 임명함)

 

그런데 '토문강'이 실제로는 따로 있단다.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의 한 지류로 백두산에서 발원해 간도 땅 중앙으로 흐르는 강이 실제의 토문강이란다.

남북통일 후에는 이런 사실들을 논리적으로 주장하고 또 받아들여져 백두산의 더 많은 부분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은 중국 땅이 되어 버리고만 북간도 땅 대부분도 우리 한민족의 땅이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長白山'이라 크게 쓰인 서파 山門에서 셔틀버스를 탔다.

버스가 꼬불꼬불한 길을 45분 달리는 동안 창밖에는 내내 원시림이었다.

국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나무는 거의 보이지 않고 온통 자작나무와 전나무들의 천국이었다.

밀림처럼 빽빽한 숲, 굽은 나무 하나 없이 하늘 높이 치솟은 모습은 장관이었다

내가 흔히 보는 남쪽의 산나무들보다 몇 배는 더 자란 것처럼 보였다.

자작나무와 전나무, 잎갈나무들은 족히 4060m는 될 것 같았다.  

여인의 하얀 종아리처럼 미끈하게 벋은 자작나무 숲을 지날 때는 마치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아름드리 잎갈나무, 전나무 숲을 지날 때는 백두산이 우리 민족에게 가르치는 氣像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해발 1,500m를 지나 수목 한게선(1,8002,000m)에 가까워지면서 자작나무가 더 극성을 부리는 듯 온 산을 하얗게 덮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아래쪽에서 보았던 미끈한 자작나무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다. 키도 작거니와 줄기와 가지가 오그라지고 구불구불하다. 기온이 낮고 바람이 센 곳이라 제대로 크지 못하기도 했겠지만 아래쪽의 자작나무와는 종이 다르단다. 자작나과에 속하는 사스레나무라고 한다.  

하지만 해발 2,000m 위로는 나무가 아예 없었다.

한없이 펼쳐진 초원은 초록 천지였다.

색색이 활짝 핀 온갖 야생화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셔틀버스에서 내린 다음 걸어서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지금도 녹고 있는 눈얼음들이 곳곳에 보였다.

한 발씩 한 발씩 오르는 1,442계단.

 

 

드디어 1,442번째 계단

'등정 성공'이란 한자와 '해발 2,470米'라 쓰인 푯말을 지나 고개를 들자 두 개의 하늘이 보였다.

하나는 백두산이 머리에 이고 있었고, 또 하나는 백두산이 가슴에 품고 있었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天池.

죽기 전에 한 번은 보아야 한다는 백두산 天池.

天池는 하늘보다 더 파란 하늘이 되어 뭉게구름도 담고 태양도 담고 있었다.

밤이면 까만 하늘이 되어 달님이랑 반짝반짝 빛나는 별을 담고, 내 고향에서조차 사라진 은하수도 담을 것 같았다.

꿈에서나 그리던 백두산에 올라 맑디 맑은 천지를 보고 있자니 마음마저 평온했다. 

오기를 정말 잘했다 싶었다.

天池를 활짝 열어주신 하늘이 한없이 고마웠다.

 

  -천지(天池)-
해발 2,190m, 면적 9.165㎢(논 13,862마지기), 둘레 14.4km, 평균수심 213.3m, 최대깊이 384m로 백두산 최고봉인 장군봉(2,750m), 백운봉, 창석봉 등 해발 2,500m가 넘는 봉우리 16개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화산활동에 의한 칼데라 湖이며, 수십 개의 유황온천과 비룡폭포, 장백폭포가 있단다.
 

 

백두산에 오른 관광객들은 꽤 많았다.

주변에서 우리말이 가끔 들리기도 대부분은 중국말이었다.

우리나라 관광객은 1/3도 안되고 나머지는 중국인일 것 같았다.

주말 아닌 금요일인데도 가족들과 함께 백두산을 찾아 이곳저곳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많은 중국인들을 보면서 이러다 백두산을 영영 되찾지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하고 있는데

쌍둥이처럼 생긴 두 개의 비석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바로 북한과 중국의 경계를 표시하는 37호 경계비다.

'조선'이라고 적혀 있는 경계비의 지역은 북한이라니 나는 북한 땅을 밟은 셈…

하지만 이 지역의 북한 땅은 중국이 임차해 관리하고 있단다.

 

천지를 배경으로 단체로 기념사진을 촬영할 때였다.

어렵사리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아 준비해 간 플래카드를 펼치는데

 아뿔싸! 노란색 조끼를 입은 한 젊은이가 오더니

플래카드를 사용하면 안 된단다.

이 순간을 위해 애써 만들어 왔는데…

   














 

백두산 천지의 氣는 다음 날 또 받기로 하고 발길을 돌렸다. 

들꽃 만발한 야생화 자생지와 '백두산의 장가계'로 불린다는 금강 대협곡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시나브로 올랐던 1,442계단을 나는 듯이 내려와서는 비빔밥으로 점심 요기부터 한 다음

야생화 自生地와 금강 대협곡에서 우리들의 눈은 또다시 호사하기 시작했다.

 

대협곡으로 들어가는 등산로 주변에 하늘 높이 치솟은 아름드리 편백나무 몸통에

혹처럼 불거진 게 보였는데 현지 가이드가 그것을 가리키면서 차가버섯이란다.

차가버섯이라면 항암효과가 뛰어나 무척 귀하고 비싼 버섯인데···

함께 걷던 가이드는 또 손가락으로 한 식물을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잎이 다섯 개 달린 게 인삼 줄기 같았다.

산삼이란다.

절로 나서 자라는 천종산삼이란다.

숲속으로 몇 발자국만 더 들어가면 세상의 진귀한 보물은 다 품고 있을 것 같은 백두산.

                    

 

금강 대협곡에 송화덕(松樺德)이란 나무가 있는데 유명하단다.

두 나무의 가지가 맞닿아서 하나의 나무가 되는 것을 연리지(連理枝)라 하는데,

이 송화덕은 하나의 몸인 둥치에서 소나무와 자작나무의 한 종류인 사스레 나무가 자란 모습이다.

두 개의 나무가 뿌리부터 얽혀 마치 부부가 한 몸을 이룬 듯한 모습이라 부부금슬을 상징하는 나무라는 설명도 있었는데,

한 둥치에서 자란 사스레는 아직 살아있지만 소나무는 명을 다한 채 껍질까지 벗고 있었으니

아마도 사스레는 암나무인 반면 소나무는 수나무가 아닐까 싶었다. 

 

금강 대협곡 관광을 마치자 래프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雨衣는 물론 구명조끼까지 착용한 채 2인용 고무보트를 타고 1시간 30분이나 내려가는 래프팅.

백두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에서의 래프팅이기에 더 뜻이 깊었다. 심한 급류는 아니었지만 스릴은 만점이었다.

보트에 노(櫓)가 하나씩 있기에 둘이서 번갈아 가며 열심히 노를 저었다. 그러나 급류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급류에서는 노를 젓기보다는 보트를 물의 흐름에 맡긴 채 흘러가는 대로 그냥 있는 것이 더 좋았다.

그게 힘이 들지 않으면서도 훨씬 빨랐다.

어쩜 세상살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겠다 싶었다.

국내외의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하루 앞을 장담할 수 없을 만큼 변화가 무쌍한 세상이라면 얄팍한 지식으로 섣불리 덤비기보다는 한 발 뒤로 물러나 관망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여유를 잃지 않은 채 인생을 즐기는 것도 좋겠고,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면서 자신을 닦고, 관찰하고 시야를 넓히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래프팅을 무사히 마친 후 천지에서 펼치지 못한 플래카드를 펼쳐 기념사진을 찍고는 이도백하로…

 

 

북파 山門이 가장 가까운 이도백하진(二道白河鎭)으로 가는 길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맑더니 구름이 모여들고 있었다.

다음 날의 일정을 설명하다 말고 차창 밖을 쳐다보던 현지 가이드가 마이크를 고쳐 잡았다. 아무래도 내일은 천지를 보기가 힘들 것 같단다. 이도백하 지역의 일기예보를 보나, 백두산 인근에서 수십 년째 살고 있는 버스기사의 경험을 들어볼 때 내일은 십중팔구 비가 와서 천지를 못 볼 거란다. 하지만 백두산에 몇 번을 왔다가도 천지를 한 번도 못 본 관광객들이 대다수인데, 우리는 오늘 한 번만에 천지를 제대로 보았으니 이 얼마나 큰 복이냐면서 내일은 천지를 보지 못하더라도 너무 서운해하지 말란다. 하늘이 백두산 천지를 이틀 연달아 제대로 보여주는 경우는 거의 없단다. 만약에 우리가 내일도 천지를 온전히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늘의 법도를 어기는 것이나 다르지 않단다.

어느새 쪽빛 대신 회색 구름을 가득 품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조금씩 마음을 비우기 시작했다.

1시간 30여 분을 달려 도착한 이도백하진(二道白河鎭).

중국에서 진(鎭)이라면 우리나라의 邑, 面 단위에 해당하는 도시다.

'이도백하(二道白河)는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물줄기 두 개가 합류하는 곳이란 의미라는데, 여기에는 '옥황상제께서 백두산 천지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도록 물길을 두 줄기로 뻗게 하여, 백성들이 가뭄을 모르고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하였다.'라는 전설이 있다니 이도(二道)는 곧 옥황상제의 물길인 셈이다.

이도백하에서 우리는 전신 마사지로 피로를 말끔히 씻은 후 저녁 식사까지 마치고 호텔로…

또 친구의 방에 모여 친구의 사위가 마련해 준 과자를 안주삼아 맥주잔을 채우며 하루의 즐거움을 나누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한 친구가 제안이 있단다.

2년 전 한라산 산행에서 이번의 백두산 여행을 제안했던 친구였다.

이번 여행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하냐면서 더 늙기 전에 아니 아예 내년에도 이런 여행을 또 가잔다.

"어디로 갈 거냐?", "언제 갈 거냐?"

설왕설래도 잠시. 

다음 여행을 '臺灣 트레킹'으로 정했다.

다음 여행을 제안한 친구에게 '대만 추진위원장직'을 맡겼다.

대만 트레킹 추진위원장을 맡은 친구의 축하연을 호텔 정원에 있는 양꼬치집에서 성대(?)하게 벌리고 있는데….

글쎄…

결국 하늘은 빗방울을 하나씩 떨어뜨리기 시작했으니…

 

 

-세쨋 날-

이도백하의 날이 밝았다.

밤새 비가 많이 왔단다. 그래서인지 이도백하의 아침은 더 신선했다.

그렇지만 밤새 호텔 옆 양철지붕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때문에 아침까지 잠을 설쳤다는 친구도 있었으니…

북파쪽 山門을 향해 출발한 버스에서 바라보는 하늘에는 짙은 구름은 사라지고 없었다. 옅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지만 군데군데에서는 파란 하늘이 보이기도 했다. 마치 天池를 열 것인지 닫을 것인지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산문으로 향하는 길 옆의 나무들은 서파쪽이랑 다름없이 하늘을 찌르는 모습이었다.

굽은 곳 하나 없이 쭉쭉 하늘로 치솟는 모습이 얼마나 시원한지 가슴이 다 후련했다.

다행히 시간이 흐를수록 하늘은 맑아지고 있었다.

북파 山門에는 어제의 서파 山門보다 더 많은 관광객들이 붐볐다.

주말이란 점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백두산에 오르기엔 서파쪽보다 북파쪽이 좀 수월해서 이쪽으로 많이 온단다.

하지만 예년 이맘때에 비하면 절반도 안 되는 인파란다. 한국인의 관광이 줄었기 때문이란다.

그러게 이처럼 중국에서도 손해가 적잖은데…

우리나라의 생존이 달린 사드 배치에 왜 중국이 '콩 놔라, 팥 놔라.' 시비를 거는지 알 수 없었다.

관광객들이 너무 한꺼번에 몰린 탓에 천지를 본 다음 장백폭포에 가기로 한 일정을 바꾸어 먼저 장백폭포로 출발.

달문을 빠져나온 천지의 물이 장백폭포를 거쳐 계곡을 이루는 소리는 듣기만 해도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갈 것 같았다. 백두산의 호쾌한 氣魄(기백)이 물에 녹아들어서 그런지 흐르는 水量에 비해 엄청 우렁찬 소리였다. 

계곡을 따라 한참을 가자 드디어 눈앞에 펼쳐진 폭포.

바로 천지의 물이 떨어지고 있는 장백폭포다.

겨울에 눈이 쌓여도 얼어붙지 않고 1년 내내 시원스레 쏟아 내린단다. 마치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이란다.

나이아가라, 이구아수 등 세계적인 폭포에야 비할 순 없겠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가장 성스러운 폭포이리라.

기념사진 촬영 후, 폭포에서 떨어져 계곡을 따라 흐르는 천지의 물을 두 손 가득 담아 보고는 발길을 돌렸다.

내려오는 길에 만나는 작은 옹달샘에서는 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바로 유황온천이란다.

온천물에서 삶은 계란을 맛본 뒤 셔틀버스를 타고 빵차가 있는 곳으로…

 

 

하늘은 어느새 어제 못잖게 맑아져 있었다.

천지 입구까지 올라가는 차를 이곳에서는 빵차라 불렀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승합차 봉고처럼 생겼는데 이게 빵을 닮았다나???

수 천의 관광객을 실어 나르느라 정신이 없을 듯한데도

톱니바퀴가 돌아가 듯 쉴 새 없이 급 비탈길을 오르내리는 빵차.

내 눈에는 빵차들이 꼭 일개미처럼 보였다.

 

 

인파에 떠밀리며 군데군데 녹지 않고 있는 만년설을 눈으로 즐기면서

또 거리낌 하나 없는 시야로 인간세상을 내려다보면서 걷는 백두산길에서

내 눈은 또 호사를 하고 있었다.

어제보다 상큼한 하늘.

어제와는 또 다른 광경의 天池.

어제의 天池는 진짜 하늘보다 더 맑은 하늘 같았지만,

이때 내 눈앞에 펼쳐진 天池는 아름다운 사발에 담긴 井華水였다.

여인네가 새벽마다 가족의 康寧과 多福을 빌며 치성을 드릴 때 장독대 위에 떠 놓는 물.

아니, 남북으로 갈린 우리 민족이, 東西로 나뉘고 또 左右로 갈라 선 우리 국민들이 한 마음으로 빈다면

한 뜻이 되어 빈다면 통일, 번영, 등 무슨 소원이든 다 이루게 해줄 神聖水, 井華水처럼 보였다.

  

(천지를 배경으로 사진 찍은 내 친구들)

 

백두산 천지의 아름다움을 이틀 연달아 만끽한 행운아들에겐 이제 여행의 마지막 밤만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 밤은 장춘공항과 그다지 멀지 않은 길림시의 한 호텔에서 묵는다고 했다.

버스가 이도백화를 가로질러 가던 중 가이드는 손가락으로 한 건물을 가리켰다.

그 건물 지붕에는 큼직한 한자로 쓴 글씨가 있었는데 바로 '白山水'.

이도백하진에서는 유일하게 외국에서 투자한 기업이라고 했다.

제주도 한라산에서 취수한 生水를 '삼다수'란 상표로 큰 히트를 친 (주)농심이 수년 전 삼다수를 제주도에 돌려주고는 백두산 물이라면서 마트마다 '白山水'란 生水를 판매하더니, 그 白山水가 바로 이곳 이도백하에서 취수한 것이란다.

백두산 기슭에서 취수한 물이 白山水라면, 우리가 이틀 동안 백두산 주변에서 마신 수돗물이 白山水요.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샤워를 했던 물도 모두 白山水가 아닌가.

어쩐지 마실 때는 물맛이 좋고, 세수할 땐 비누를 푼 듯 매끄럽다 했더니…

백두산에서 코와 눈, 마음만 호사한 줄 알았더니 그러고 보니 손, 발, 몸 등 온몸이 호사를 한 셈이었다. 

이도백하를 떠나기 전 들른 농산물 판매장.

이곳 상품은 모두가 더없이 넓은 간도지방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란다.

농산물로는 없는 게 없는 것 같았다. 매장을 둘러보던 친구들의 장바구니엔 농산품들이 하나씩 쌓이고

'아무것도 사지 말라.'는 아내의 엄명(?)을 떠올리며 구경만 하고 있자니 좀이 쑤셨다.

잠시 뒤 내가 들고 다니는 장바구니엔 석이버섯 한 봉지, 잡곡밥에 넣을 좁쌀 한 봉지, 아내가 무슨 죽을 끓이면서 쉬이 구입하지 못해 애를 먹곤 하던 껍질을 벗기지 않은 녹두, 그리고 요구르트에 넣어 먹을 꿀벌이 만든 화분이 담겨 있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길림시로 출발.

또 5시간 30분이나 걸렸지만 차 속에서 현지 가이드가 말하는 중국인과 만주족의 생활상, 집 구조 등 그들의 문화를 들으면서 한잔 술에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사이 버스는 길림시에 도착했다.

여장을 푼 우리는 모두 호텔을 빠져나와 시내의 호프 같은 술집에서 멋진 백두산 여행의 성공을 自祝하고, 또 우리 친구들의 건강과 우정이 변치 않기를 기원하면서 늦은 시간까지 맥주병을 비우며 마지막 밤을 즐겼다. 

 

 

     -마지막 날-

 

 

버스로 30여 분을 달리는 동안 가이드는 우리가 묵었던 호텔에서 거행되던 

결혼예식을 이야기하면서 신랑이 신부를 데려올 때 지급하는 비용 등

중국 漢族들의 결혼문화와 생활상을 들려주었다.

  누군가와 전화를 마친 가이드 마이크를 잡더니 말했다.

"지금 백두산에는 비가 온답니다." 

'우리 떠나자마자 비가 오다니…'

기분이 좀 묘했다.

나는 잠시 기분이 좋기까지 했으니…

백두산의 맑은 정기를 가슴 가득 담아 내가 좀 착해진 줄 알았는데, 아직은…

 

정시에 장춘공항을 떠난 아시아나機를 타고 도착한 인천국제공항

시계는 2017년 7월 9일 오후 2시 2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3박 4일의 백두산 여행'

천지를 두 번이나 볼 수 있었던 행운의 여행이었다.

백두산이 왜 애국가의 歌詞에 들어갔는지 알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백두산을 왜 우리 한민족의 聖山이라 일컫는지 이해할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우리의 자식들은, 우리 손주들은 長白山'이란 한자가 아닌 '백두산' 이란 한글이 선명히 새겨진 이정표를 따라

천지에 올라 백두산의 氣像 느끼고, 精氣를 맘껏 받길 바라는 소원을 품게 한 여행이었다. 

 

세 밤을 자야 할아버지가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나를 기다리며 

날마다 할머니에게 언제가 세 밤이냐고 물었다는 손주들을 품에 안았을 때

호주머니 속에 있던 핸드폰이 소리를 냈다 

"카톡"

멋진 날, 멋진 친구의 멋진 德談이었다.

"모두들 덕택에 잘 다녀왔습니다.

우리 자식도 천지를 잘 볼 수 있도록

리도 덕을 쌓으며 항상 양보하고

이해하면서 생활합시다."

 

 

(장백폭포)
(북파로 올라서 본 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