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 양보
이 석 도
시내에서 점심 모임을 끝내고 지하철을 탔다.
낮 시간이라 그런지 붐비지는 않았지만 빈자리가 없었다. 나는 경로석 부근 출입구 앞에 서서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면서 맞은편의 경로석을 쳐다보았다.
경로석에 앉은 어떤 남자는 큼직한 여행용 가방을 잡고 서 있는 아름다운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차림새를 봐서는 같이 여행을 다녀오는 것 같았다.
경로석에 앉아 있던 그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내게 오더니,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저씨, 저기 앉으세요.”
“……”
남자를 쳐다보았다. 머리숱이야 나보다 훨씬 많았지만, 희끗희끗한 머리를 보니 나와 나이 차이가 그다지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나보다 젊지도 않으면서…’
이상했다. 학생들이 내게 자리를 양보할 때는 그 학생이 예의바르고 기특해 보이기까지 했는데,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남자로부터 자리를 양보 받으니 기분이 좋기는커녕 오히려 나빴다. 아침마다 헬스장에서 운동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웃통이라도 벗어 근육을 내보이고 싶었다.
경로석 앞에 서 있던 여인이 남자에게 다가가서 웃으며 하는 말이 들려왔다.
“자기야, 잘했어. 그런데 자기가 별로 더 젊은 것 같지는 않은데….”
‘중년 여성으로부터까지 노인 대접을 받다니….’
기분이 더 나빠졌다.
고맙게 여겨야 할 자리 양보가, 내게는 아름다운 여성 앞에서 호기를 부리는 것처럼 보여 속 좁은 내가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다.
얼마 남지 않은 앞머리를 옆으로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나도 머리카락만 많아지면, 10년은 더 젊어 보일 텐데…’
그러는 사이 지하철이 역에 닿자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렸다.
기왕에 양보 받은 경로석. 이제 앉아서 가야지 마음을 먹고 빈자리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를 지나치더니 그 자리에 먼저 앉아버렸다.
내게 자리를 양보한 사람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경로석에 앉기가 민망했던지 앉자마자 눈을 감았다.
'죽 쑤어 개 준다더니…'
집에 오자마자, 나는 TV방송을 보고 담근 [어성초 발모제]가 든 항아리를 열어보았다. 채 한 달도 되지 않았지만 확 풍기는 독한 냄새를 맡는데, 문득 ‘머리숱이 많아진다고 정말 젊어지는 건 아니다.’는 걸 깨달았다.
‘늙음과 젊음이 머리숱으로 구별되는 게 아니라, 마음먹기에 달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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