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비게이션
이 석 도
경기도 광주에 있는 농장으로 가던 길이었다. 평소에는 3번국도로 다녔지만, 최근 개통된 성남과 광주간의 자동차 전용 도로를 탈 요량으로 성남시청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하지 않고 우회전을 했다. 그러자 내비게이션이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300미터 앞에서 유턴입니다.”라고 안내했다. 안내를 무시하고 달리자 내비는 교차로가 나올 때마다, 유턴 또는 좌회전을 지시하며 계속해서 국도 쪽으로 갈 것을 안내했다. 말을 너무 듣지 않아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일까? 안냇말에 신경질이 섞인 듯 들리기도 했지만, 전용 도로에 들어서자 이내 내비는 조용해졌다. 자신의 지도엔 도로가 아닌데도 달리고 있으니, 갈피를 못 잡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모양이었다.
농장이 얼마 남지 않은 곳에서 횅하니 달리던 전용 도로는 끝이 났다.
기존 도로에 합류하자마자 내비게이션은 다시 안내하느라 바빠졌다.
“500미터 앞에서 80키로 구역입니다.”, “300미터 앞에서 좌회전입니다.”
언젠가가 골프장으로 같이 가면서 차를 운전하던 친구가 한 말이 생각났다.
“편하게 살려면 세 여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던데, 누군지 알아?”
“어릴 땐 엄마, 결혼 후엔 집사람이란 건 알겠는데…, 딸인가? ”
“내비게이션이래”
이 이야기를 옆자리에 앉은 집사람에게 들려주고, 물었다.
“내가 당신 말을 얼마나 잘 들었는지 점수로 매기면 몇 점이나 될까?”
그러자 집사람은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다.
“요즘이라면 7,80점은 주겠는데; 당신이 젊었을 때는 40점, 아니 30점?”
어릴 때, 나는 어머니의 말을 무척 안 들었다. 그때는 ‘깊은 물에 들어가지 마라’, ‘편식하지 마라’ 하고 싶은 것은 하지 못하게 하고; ‘공부해라’, ‘목욕 자주 해라’ 하기 싫은 것만 시키는 잔소리꾼인 줄 알았다. 훗날에는 딸들에게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을 보고 웃고 말았지만…. 팔순을 넘기신 어머니는 요즘도 ‘건강 조심해라’, ‘운전 조심해라’ 등 여전히 걱정 섞은 말씀을 자주 한다. 그렇지만 지금은 잔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설령 잔소리라 할지라도 오래오래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결혼 후에는 집사람과 의견이 상충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편협함이 집사람의 옳은 말까지 쓸데없는 간섭으로 여기게 만들었던 것 같다. 지금은 집사람의 말을 잘 듣는 순한 남편으로 많이 바뀌었다.
농장에 도착하자 사돈 내외가 손을 흔들며 반겼다.
나는 집에 돌아가는 즉시 내비게이션을 업데이트해야지, 그리고 보다 편한 삶을 위해 이제는 세 여인의 말을 잘 들으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오늘 내가 낡은 정보라는 이유로 말을 듣지 않고 무시한 내비게이션처럼, 내 자신도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자주 최신 정보로 업데이트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201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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