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필귀정
아주 무더운 한여름의 어느 날.
훤칠한 키에 외모까지 잘생긴 한 남자가 서울 주요 지역을 순환하는 서울 지하철 2호선에 타고 있었는데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바깥과는 달리 에어컨을 빵빵하게 튼 지하철 안은 닭살이 돋을 정도로 시원해서 피서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다는 듯이 팔짱을 낀 채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지하철 안은 완전 콩나물시루였다..
타자마자 운 좋게 좌석을 차지한 그 남자는 지하철이 한 바퀴를 돌아도 내릴 줄 모르고 앉아 있었다.
한두 바퀴 더 돌 요량이었으니 몇 정거장만 지나면 두 바퀴를 도는 셈이다.
시청역이 가까워질 무렵 갑자기 그 남성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내의 전화였다.
“여보, 어디야?”
“지하철 타고 있는데, 왜?”
“집에 있는 아이들 점심은 챙겨줬어?”
“아니, 걔들 용돈 받은 거 있잖아. 그걸로 사 먹겠지···”
“그렇다고 그냥 가면 어떡해. 지금 걔들 점심 못 먹고 있대. 빨리 가서 좀 챙겨줘요.”
‘알았어. 곧장 갈게 “
지하철이 시청역에 도착하자마자 그 남자는 내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승객들의 하차가 끝나자 두 줄로 서 있던 사람들이 승차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몇 사람 뒤에 서 있던 한 남자가 앞사람들을 밀치면서 후다닥 승차하더니 훤칠한 남자가 내리기 전에 앉았던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고는 잠자는 체 두 눈을 감고 있는데 그 모습이 어딘가는 좀 약삭빠른 원숭이를 닮은 듯 보였다. 그에게 떠밀려 먼저 승차해 그 빈 좌석으로 향하던 좀 어리숙해 보이는 남자는 계면쩍은 듯 찡그린 얼굴로 웃으며 철수하고···
원숭이 닮은 남자도 시원한 순환선 지하철이 재미난 모양이었다.
첫 바퀴를 돌 때는 지그시 두 눈을 감은 채 미동조차 않더니 두 바퀴째부터는 손잡이를 잡은 채 서 있는 승객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잠시도 입을 다물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니라 일방적인 설교처럼 보였다. 이야기는 주로 '正義'란 단어로 시작해 '公正'이란 단어로 끝나고, '여성들의 권리'란 우리말로 시작해 '페미니즘'이란 영어로 끝나는 것 같았다. 자신만이 마치 정의의 사도인양 으스댈 뿐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은 모두가 공정의 표본인양 떠들어댔다. 자신이 대한민국 제일의 女權 운동가라며, 자신은 세상에 둘도 없는 도덕군자라며 어깨까지 으쓱대곤 했다.
지하철이 세 번째 바퀴를 돌 때였다.
한강변 어느 역에 도착하자 한 젊은 여성이 승차했다.
차 안을 두리번거리던 여성은 빈자리를 발견하곤 그 자리로 가 앉았다. 원숭이 닮은 신사의 바로 옆자리였다. 갑자기 풍겨오는 분 냄새 때문일까? 자는 체 눈을 감고 있던 원숭이 닮은 신사는 게슴츠레 눈을 뜨고 옆을 쳐다보다 깜짝 놀랐다. 웬 떡인가 싶었다.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게 아닌가.
보고만 있자니 꼴깍꼴깍···
잠든 척하면서 여자의 무릎을 건드리고 엉덩이를 슬쩍슬쩍 쓰다듬어 보지만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하철 안의 승객들 대부분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졸고 있고 나머지 승객들은 고스톱 게임이라도 하는지 핸드폰엔 온 신경을 붙들어 매어 놓고 있었다. 원숭이 닮은 신사는 한참 동안 고민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 같다 싶어서일까 용기를 내는 듯 보였다.
먼저 자신의 손을 여자의 무릎 위에 올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는 여자를 힐끗 쳐다본 원숭이 신사는 여자가 깊은 잠에 빠졌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무릎 위에 얹었던 자신의 손을 살금살금 뱀이 기어가듯 여자의 스커트 속으로 깊숙이 집어넣는 듯 보이더니 이내 손가락을 꼼지락꼼지락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잠든 줄 알았던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성추행범이다.”
원숭이 닮은 신사는 눈앞이 캄캄했다.
지하철에 있던 모든 시선들이 그쪽으로 향했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 승객도 있고 112번을 누르는 승객들도 있었다.
눈만 내놓은 채 온 얼굴을 마스크로 가리고 있어 조금은 다행이다 싶었지만 원숭이 닮은 남자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마스크가 벗겨지는 날에는 평생 쌓은 명예가 다 날아갈 판이니 살아도 사는 게 아닐 듯했다. 자신의 맨얼굴을 보이느니 달리는 전동차지만 차라리 뛰어내리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마침 지하철은 어떤 역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다행히 환승역이었다. 원숭이 닮은 남자는 지하철이 정차하면 곧장 다른 지하철로 갈아타리라 마음먹었다.
지하철이 정차했다.
승하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원숭이 닮은 신사는 그 사이를 뚫고 냅다 뛰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달리고 달려 “출입문을 닫겠다.”는 방송이 흘러나오는 다른 열차에 올랐다. 그가 타자마자 출입문은 닫히고 열차는 출발했다.
그런데 이를 어쩔꼬·········
막 역을 벗어나는 그 열차의 꽁무니에는 ‘벽제행’이란 행선지 알림판이 달려 있었으니·········
원숭이 닮은 남자를 내려놓은 지하철 2호선 순환 전동차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달렸다.
몇 정거장을 지나 시내 한복판의 역에 도착하자 많은 승객들이 우르르 승차했다.
승차한 승객들 중에는 원숭이 닮은 남자의 동료 여직원도 있고 원숭이 닮은 남자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던 훤칠한 키의 남자도 있었다. 그 둘은 승차하자마자 여전히 빈자리로 남아있는 원숭이 닮은 남자가 앉았던 자리로 달려가 엉덩이를 들이밀었지만 하나의 자리에 두 엉덩이가 동시에 들이닥치니 엉덩이만 부딪칠 뿐 둘 다 앉지를 못한다.
이를 보다 못한 한 승객들이 한 가지 방법을 제안하고 이들은 받아들였다.
‘가위 바위 보 삼판양승’이었다.
‘가위 바위 보’를 세 판 하되 두 판을 먼저 이기는 사람이 앉기로 한 것이다.
“가위 바위 보”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첫 게임이 진행되었다..
훤칠한 키의 남자는 ‘가위’, 원숭이 닮은 남자의 동료 여직원은 ‘보’, 남자의 승리였다.
두 번째 게임이 시작되었다.
“가위 바위 보”
남자는 ‘주먹’ 그리고 여자는 ‘가위’였으니 또 남자의 승리로 2 : 0.
나머지 세 번째 '가위 바위 보'는 할 필요도 없는 훤칠한 남자의 압승이었다.
훤칠한 키의 남자는 의기양양하게 두세 바퀴 전에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다시 앉지만 ‘가위 바위 보’ 게임에서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여자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중얼거리며 옆 칸으로 가버리는데 중얼거리는 입술 모양을 보자니 마치 ‘나쁜 놈, 조금만 더 앉아 있다가 내게 자리를 넘겨줘야지 그렇게 도망가 버리면 어떡해…“ 하면서 원숭이 닮은 남자를 원망하는 듯했다.
한여름의 더위를 식힐 요량으로 순환 지하철에 올라서는 진종일 건너편 좌석에 앉아 이들의 행동을 처음부터 바라보고 있던 친구 사이의 몇 사람이 큰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세 바퀴 전에 내렸던 사람이 다시 타 내리기 전에 앉았던 그 자리에 다시 앉다니 참 희한한 일이다. 우연이겠지?”
“먼저 앉았던 양반이 비워준 자리에 앉았던 사람의 자리가 비워준 양반에게 다시 돌아갔잖아. 그러니 이건 우연이라기보다 필연이 아닐까?”
그때까지 친구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만 있던 친구가 입을 열었다.
“내가 볼 땐 우연도 아니고, 필연도 아니야. 시끄럽던 지하철 안이 예전처럼 다시 조용해졌으니 '바를 정'의 정(正) 대신 '고요할 정'의 정(靜)을 쓴 사필귀정, 즉 事必歸靜이지.”
그러자 우연이니 필연이니 했던 친구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事必歸正'이자 '事必歸靜'이네.”
"내년에는 우리 대한민국도 사필귀정해야 할 텐데···"
지하철 2호선 순환 전동차는 아무 일도 없는 양 달리고 있었다.
{2021.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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