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선물
(내 고향 청도의 봄)
2019. 4. 13. 토요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해마다 4월의 이맘때쯤,
아파트의 초인종이 울려 대문을 열면 문 앞에 택배로 배달된 큼직한 박스 하나가 놓여 있곤 했었는데…, 상자 속 돌돌 말린 신문지들을 풀어헤치면 사위도 주지 않는다는 첫물 정구지(부추), 그리고 갓 피기 시작한 두릅, 아기들 피부만큼이나 보드라운 머위, 돋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연하디 연한 재피나뭇잎, 밭도랑에서 뜯은 첫물의 돌미나리 등등 봄이 가득한 종이박스를 받고는 고향집으로 잘 받았다는 전화를 드리면 어머니께서 “야야, 두릅이 한창이다. 언제 한번 내려올래?” 하셨는데…
어머니의 봄상자가 멈춘 지 벌써 다섯 해째.
“두릅이 한창이다, 언제 한번 내려올래?” 바로 어제 들은 듯 귀에 쟁쟁한 어머니의 말씀을 떠올리며 집사람과 함께 집을 나섰다. 서초동으로 가서는 대구에서 상경해 딸의 집에서 초등생 외손녀를 돌보아주고 있는 내 바로 아래의 여동생을 승용차에 태우곤 고속도로에 올랐다.
봄꽃의 유혹을 못 본 체할 수 없는 사람이 많아서일까?
6시 30분밖에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인데도 경부고속도로 하행 길은 차들로 넘쳤다.
연두색으로 갈아입기 시작한 산야(山野)와 마지막을 장식하고픈 끝물 벚꽃이 화려함을 뽐내고 있는 창밖을 즐기며 페달을 밟았다. 뒷자리에 앉은 집사람과 여동생은 무슨 할 얘기가 그리 많은지 잠시도 쉬지 않고 깔깔거리며 대화를 나누었다. 운전하면서 들어보니 오래 전부터 정토회에 다니는 집사람과 집사람의 권유로 작년 여름부터 정토 불교대학에 다니는 여동생이 정토회에서 하는 경전공부와 봉사활동 등의 이야기와 부모님을 비롯한 우리 가족들에 대한 추억이 대부분이었다.
3시간을 달려 거의 다 떨어진 꽃의 자리에 제법 파릇파릇한 잎이 돋은 벚나무가 즐비한 대구를 지나 우리를 실은 승용차가 청도에 들어서자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온천지가 분홍이었다.
산기슭은 말할 것 없고 산중턱까지 분홍천지였다.
고향의 가을을 빨갛게 물들이는 청도반시와 함께 내 고향의 주요 특산품 중 하나인 복숭아꽃이 만발한 것이다. 창밖을 바라보기만 해도 心身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청도읍을 거쳐 도착한 고향집
4년 반 전까지만 해도 반질반질하던 집이 어떻게 이렇게 변했나 싶었다.
곳곳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때와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기에 가슴이 더 아팠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잠들어 계신 곳으로 향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일생(一生)이 담긴 감밭.
부천에 사는 형님께서 귀농을 포기하신 탓에 감밭이랑 감밭 아래의 밭도 잡초 천국이었다.
하지만 작년에 어른 키 높이만큼 자라 말라버린 잡초를 헤치며 들어서자 곳곳에 고사리가 삐쭉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생전의 아버지께서 아침마다 감밭에 들러 고사리를 몇 개씩 꺾어 오시면 어머니께서는 그때마다 그것을 삶아 말린 후 모으고 또 모아 제사에 쓰도록 형님댁에 보낸다고 하셨는데…, 엄마는 오늘 작은아들이 고향에 온다는 걸 아셨나 보다.
평생을 바쳐 일군 감밭에 오동통 살찐 고사리뿐 아니라 온갖 봄나물들을 내놓으셨다.
두릅
머위
돌나물
취나물
달래
재피잎
쑥
··················
몇 시간 후, 대구로 향하는 내 차의 트렁크는 엄마의 선물로 가득찼다.
하지만…, 나는 대구에서 누이들과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야 깨달았다.
엄마가 주신 진짜 선물은 봄나물이 아니라
우리 오남매의 우애(友愛)임을.
복숭아꽃 만발한 청도
강 건너 산기슭에서 만발한 청도 복숭아꽃
청도읍에 도착해 찾아간 청도역전의 추어탕집.
미꾸라지를 갈아서 탁하게 끓이는 남원추어탕, 원주추어탕과는 달리 꺽지 등 민물 잡어를 푹 고은 다음 빡빡 문질러 뼈를 발라낸 후 얼갈이배추로 말갛게 끓이는 청도역전의 추어탕이 얼마나 맛나던지 모른다. 바로 어릴 때부터 먹었던 엄마의 추어탕 맛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가서 맛있게 먹었던 여러 해 전의 그때가 너무너무 그리웠다.
청도읍에서 20km 길을 20여분 운전해 도착한 고향
숨겨 둔 열쇠를 찾아 굳게 닫힌 대문을 열고 들어선 고향집.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티끌 하나 없을 만큼 반질반질 했던 고향집인데 마당 곳곳엔 잡초가 무성할 뿐 아니라 어머니께서 애지중지하셨던 부엌 앞 굵직한 치자나무는 지난 겨울 말라 죽었는지 새싹 돋을 기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 옆의 앵두나무 줄기마다에 다닥다닥 달린 꽃봉오리는 수일내 꽃을 피우고
오래지 않아 빨간 앵두를 자랑하려는 듯 보였는데…, 나는 5월쯤에 배달되는 어머니의 몇 번째 봄상자 속에 상추,
쑥갓, 취나물 등 갖은 봄나물 틈에 숨겨졌던 빨알간 앵두가 떠올라 가슴이 먹먹했다.
저 앵두나무에 곧 예쁜 꽃들이 활짝 필 텐데 누가 봐주려나?
앵두나무에 주렁주렁 달릴 빨간 앵두는 누가 따려나?
아버지 떠나신 지 7년, 어머니 떠나신 지 3년,
아버지께서 타셨던 자전거와 어머니께서 타셨던 전동차가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쓴 채 헛간에 서있고,
해마다 이맘때면 갖가지 꽃들이 활짝 피었던 화분들은 텅 빈 채 나뒹굴고 있는데…
내달이면 홍자색 꽃 활짝 피울 모란이 목 말라하면 누가 물을 주려나?
흐드러지게 필 모란꽃에게 예쁘다고, 수고했다고 칭찬은 누가 하려나?
6월이면 보리수나무에 주렁주렁 달릴 빨간 열매는 누가 따려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산소
감밭에서 고사리를 꺾는 여동생
내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산기슭 나무를 뽑아낸 후 개간해서 뽕나무를 심고 잠사(蠶舍)를 지어
누에를 치셨고, 그 뒤에는 청도반시가 열리는 감나무를 심어 내어 우리 오남매를 키우셨던 피땀의 밭.
감나무, 모과나무, 두릅,나무 매실나무, 옻나무, 살구나무, 호두나무 등 갖가지의 유실수는 물론
고사리, 머위, 더덕, 취나물, 재피 등등 봄부터 가을까지 온갖 나물이 자라는 보물밭.
감밭 곳곳에는 이처럼 아기 손가락만큼이나 포동한 고사리들이…
나와 여동생이 잠시만에 꺾은 고사리들
감밭 계곡의 대나무 숲에서 어린이 손바닥만큼 자란 머위
연하디 연한 머위를 뜯는 집사람
조팝나무가 감밭 모퉁이에서 엄마 미소를 닮은 하얀 꽃을 달고 우리를 반겼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봄 음식 중 하나인 재피장떡(된장에 다진 육고기와 재피나무 새싹을 넣어
동그랑땡처럼 부치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갓 돋은 재피나무 새싹을 따는 내 손.
감밭 한켠에서 재피나무 새싹을 따는 여동생
등산을 하다보면 재피나무인지 산초나무인지 헷갈리는 나무가 많은데…
구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첫째, 재피나무나 산초나무 모두 잎자루 바로 밑에 가시가 나
있지만, 재피나무는 가시가 두 개씩 서로 마주 달리고, 산초나무는 하나씩 서로 어긋나게 달려 있다.
두 번째 구별 방법은 꽃피는 시기가 서로 달라 재피나무는 봄(4~5월)에 황록색으로 피고
산초나무는 여름이 가고 가을의 문턱(8~9월)에 연한 녹색 기미가 있는 흰색으로 핀다.
추어탕에 향신료로 넣는 것은 산초가 아니라 재피(초피).
아직은 조금 이른 듯 피어나는 두릅나무 첫 순
초리마다에 돋기 시작한 두릅 첫순을 꺾으려니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새싹 틔울 즐거움으로 지난 겨울의 그 모진 추위도 견뎌냈을 텐데…
아직 다 피지도 않은 순을 똑똑 꺾어가는 내가 얼마나 미웠을까?
가시에 찔리는 손이 아팠지만, 몸 꺾이는 두릅나무의 아픔에
비할 수 있으랴 싶어 얼굴 한번 찡그릴 수 없었다.
꽃을 좋아하셨던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작년 봄에 내가 심었던 라일락
보라색 꽃 활짝 피었으면 좋으련만 이제 겨우 봉오리 몇 송이를 달고 있었다.
봉분 등 잔디 곳곳에 고개를 내민 잡초를 뽑는 동생과 집사람
한결 말끔해진 아버지와 어머니의 산소
부천에 사는 형님께서 작년부터 농사를 포기함에 따라
어른 키만큼 자란 잡초들이 자기들 세상으로 만들어 버린 밭
농기구 창고…
감밭에서 채취한 뒤 대구 여동생 집에서 자정까지 다듬은 갖가지의 봄나물
어머니께서 여러 채소들을 가꾸셨던 재전밭에서 자란 첫물 정구지.
뜯을 때 보니 절반은 잡초였지만 잡풀을 골라내면서 다듬었더니 이처럼 실하게 잘 자랐다.
부부간의 정을 오래 유지시켜 준다하여 정구지(精久持)라지만, 정구지는 경상도 방언으로 표준어는 부추.
'봄 정구지는 인삼, 녹용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말과 "첫물 정구지는 아들도 안 준다.'는 말이 있을 만큼
몸에 이롭단다. 정구지가 남자들에겐 신장을 따뜻하게 하고 생식기능을 좋게한다 하여 온신고정(溫腎固精),
남자의 양기를 세운다 하여 기양초(起陽草), 과부집 담을 넘을 정도로 힘이 세진다 하여 월담초(越譚草),
장복하면 오줌줄기가 벽을 뚫는다 하여 파벽초(破壁草) 등 많은 별명을 가지고 있단다.
대구에 도착해서는 함께 미장원으로 가더니 파마 등 단체로 머리손질을 받은 후
엄마의 선물인 봄나물을 자정이 넘도록 다듬고 손질하느라 힘들었을 텐데도
아침부터 호호 하하… 정담을 나누는 누나와 두 여동생 그리고 집사람
엄마의 선물인 봄나물과 누나와 동생들이 준 김치, 된장 등으로 가득찬 트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