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규와 함께한 헌혈
2018. 10. 9. 화요일
헬스장이 문을 열지 않는 공휴일이라 딱히 할 일이 없는 한글날 오전.
어제까지 도보여행한 사람이 무슨 피를 뽑느냐며 오늘 하루는 그냥 푹 쉬라는
집사람의 핀잔(?) 섞인 잔소리를 귓전으로 흘리며 은규네로 갔다.
엄마랑 아빠랑 놀고 있는 은규를 데리고 헌혈의집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자원봉사자는 귀한 손님이 왔다면서 우리를 반기더니
내가 전자문진을 입력하는 동안에 은규를 데리고 잘 놀아주었다.
잠시 뒤, 현장 문진실에 따라들어간 6살인 은규는 궁금한 게 많았다.
혈압을 재는 내게 혈압기에 오르내리는 숫자에 대해 묻고
혈액형 검사를 위한 피를 뽑을 땐 아프지 않은지, 왜 피를 뽑는지 물었다.
혈액형을 확인하는 간호사의 물음에 내가 "A형"이라고 답하자
영어유치원에 다니고 있어서 그런지 은규는 큰소리로 물었다.
"할아버지, 왜 A형이예요? A형이 뭐예요?"
간호사가 귀엽다는 듯 미소를 지며 혈액형의 종류를 자세히 들려주자
은규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제법 의젓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헌혈을 기다리는 동안 은규와 나란히 앉아 음료수를 마신 후
내가 헌혈의자에 오르자 은규는 잽싸게 내 옆에 올라
헌혈 과정 하나하나를 신기한 듯 바라보는데
간호사들은 이런 은규가 더 신기한 듯 다가와 선물을 주며 말을 걸었다.
"어쩜 이리 잘 생겼니…"
"몇 살인데 이렇게 점잖아?"
"완전 할아버지 껌딱지네…"
"다음에 또 와라"
선물보따리를 들고 강남헌혈의집을 나설 때
우리 은규는 기분이 엄청 좋은 듯 깡충거리며 말했다.
"할아버지, 저도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헌혈할 거예요."
은규의 말을 들을 때 기쁨과 설움이 교차한 건 왜일까?
우리 은규가 첫 헌혈할 때 내 나이는 몇이나 될까?
그때도 은규랑 함께 헌혈하러 다닐 수 있으면 좋겠다.
그땐 은규가 헌혈하고, 나는 껌딱지로…
몇 해 전에는 원준이랑 이곳에 왔었고
오늘은 은규랑 왔으니
다음엔 세은이랑…
헌혈 제한 나이는 만 69세.
이제 내가 헌혈할 수 있는 기간은 5년밖에 아니 남았으니…
은규가 한창 헌혈할 때쯤이면 나는 80대? 아니 90대?
간호사들이 은규에게 준 과자, 책 등의 선물들과 헌혈증
손자와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한 헌혈이
행복한 시간이었는데 몇 시간 뒤엔 재미난 일까지 일어났다.
은규와 의자에 함께 누워 헌혈하는 두 번째 사진을 아무런 설명 없이
친구들 단체카톡방에 올렸더니 여러 친구로부터 전화 또는 카톡이 날아들었다.
그런데 하나 같이 나를 염려하고 응원하는 내용이었다.
친구들은 내가 전날 마친 도보여행에서 탈이 생겨 입원해
영양제 주사를 맞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했던 것이다.
나를 걱정하고 응원하는 친구들이 이렇게
많구나 싶어 더 행복했으니…
오늘 헌혈은 행복 두 배의 헌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