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을 즐기다
2018. 7. 20. 금요일
겨우 200여 미터를 걸었을 뿐인데도 가슴골에 땀이 줄줄 흘르는 아침.
오늘은 친구들과 한 달 전에 약속했던 젠스필드CC로 라운딩 가는 날.
지난 6월 초 페럼CC에서 라운딩을 마친 뒤 네 명 모두의
일정을 감안해 어렵사리 잡은 날이 오늘인데
이렇게 뜨거울 줄이야…
짧은 장마가 끝나기가 무섭게 시작해 일주일이 넘도록 계속되는 폭염이라
이틀 전에 예약을 취소하려 했지만 페널티가 20만원이라는 골프장의 협박 아닌 협박에
찍소리 한 마디 못한 채 하늘이 열흘이 다 되도록 빗방울 하나 떨어뜨리지 않았으니
어쩌면 오늘은 물조리개를 뿌리거나 선풍기를 돌릴지 모른다는
야무진(?) 꿈을 꾸면서 약속장소로 향했다.
수지에 있는 남영골프연습장
이곳에 모인 우리는 영동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하면
골프장 입구에 있는 음식점에서 여유있게 점심을 먹을 수 있기에 영동고속도로를 타기로 하곤
기팔 친구가 운전 하는 승용차에 몸을 실은 다음 세상사를 나누기 시작했지만
수지를 벗어나 신갈분기점에 다다르자
골프이야기에 흠뻑 빠진 우리 차는 그만 경부고속도로 들어서고 말았으니…
기흥IC에서 다시 올라와 영동고속도로를 타느냐
아니면 그냥 경부고속도로로 가다 안성JC에서 평택제천 고속도로를 타느냐
잠시 고민했지만 우리는 그냥 달려 안성JC으로 가기로 하고는 Go∼Go∼
아뿔싸!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오전인데도 차는 왜그리 많은지 안성까지 가는 길의 체증이 장난 아니었다.
내비에 나타나는 골프장 도착예정 시간은 12시 20분
티업시간은 12시 25분인데…
다들 아침을 대충 먹어서 점심식사는 제대로 먹어야 하는데…
골프장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한 뒤 티업시간 변경을 요청했지만 소용 없었다.
평택제천고속도로에 들어서자 1분이라도 단축하고 싶은
기팔 친구는 연신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대기 시작했지만 아무래도…
나는 에어컨 빵빵한 조수석에 앉아 폭염에 이글거리는 아스팔트 위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바라보면서 오래 전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떠올리고 있었다.
10년 전쯤의 일이다.
무더운 한여름의 어느 일요일에 동료들과 골프장으로 가던 중이었다.
차에 동승했던 한 선배는 웃으며 아침에 어머니와 통화했던 이야기를 했는데
한창 골프가방을 챙기고 있을 때 시골에 계신 老母께서 전화를 하셨단다.
"야야, 요즘 디기 더븐데 우예 지내노? 오늘은 머하노?"
"잘 지냅니더, 오늘은 공 치러 갈려구요."
"해필 이 더븐 날 하노? 꼭 해야 대마 놉 사서 해라."
골프 치는데 일꾼을 사서 하라고 했다는 선배의 老母 말씀에 동승자 모두가 박장대소하면서
당신들은 뙤약볕 아래서 땀을 팥죽같이 흘리며 콩밭을 매면서도 추우면 추울새라 더우면 더울새라
자나깨나 자식들만 걱정하시는 부모님들의 가없는 사랑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었던…
점심 먹기를 포기하고 빵이라도 살 요량으로 가게를 찾던 중
삼성면 소재지에서 김밥집을 발견했을 때는 얼마나 반갑던지 모른다.
할머니가 급히 말아주신 여덟 줄의 김밥과 음료수를 들고
시작한 폭염 속의 라운딩.
뜨겁긴 뜨거웠다.
샷 한 번하고 물 한 모금
샷 한 번 하고 물 한 모금
18홀 내내
몇 통이나 마셨을까?
뚝
뚝
뚝
땀 떨어지는 소리
우리 뒤의 한 팀을 먼저 보내고 카트에서 먹었던,
손맛 좋은 김밥집 할머니 두툼하게 말아주신 김밥이 얼마나 맛나던지
나는 게눈 감추듯 두 줄을 해치웠으니…
냉온탕을 오가며 샤워를 마친 뒤
오장육부까지 시원케 하는 소맥은 폭염 라운딩의 별미 중 별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