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후배의 선물
2016. 12. 31.(토요일)
이제야 다 읽었다.
해를 넘기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우스개가 있더니만, 은행을 정년 퇴직하고는 직업도 없는 내가 꼭 그 짝이다.
오전엔 운동하고, 동호회 가서 색소폰 연습하고, 은규를 하원시켜 같이 놀다 10시가 넘어서야 글을 쓰거나 블로그를 좀 들여다 보다 보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이니, 책 읽을 시간은 만들지 못하고 읽을 책만 한두 권씩 쌓이고 있었다.
이랬던 내가 최근 책을 한 권 읽었다.
'窮卽通'이라더니….
마침내 책 읽을 시간을 찾아낸 것이다.
나는 아침 운동을 유산소 운동으로는 러닝머신을 한 시간씩 타고 나서 근력 운동을 했었지만, 요즘은 유산소 운동을 러닝머신 30분과 자전거 30분으로 나누었다. 그래서 자전거 타는 시간에 책을 읽고 있는데 아주 딱이었다. 러닝머신을 타면서는 주로 바둑TV를 보고, 자전거기 탈 때는 책을 읽으니 지루함도 덜해서 참 좋다. 같이 운동하는 집사람으로부터 책 읽는 자세가 바르지 않다며 핀잔을 자주 받고, 하루 일이십 분씩 시나브로 읽다 보니, 책 한권을 읽는데 한 달여나 걸렸지만….
「꽃이 올라가는 길」
이 산문집은 초등학교 후배인 이승숙 작가가 쓴 책이다.
그런데 나는 이 후배를 한두 해 전까지는 전혀 몰랐었다.
그녀는 가끔 초등학교 총동문회의 카페에 고향에 대한 글을 올리곤 했었는데, 글이 얼마나 깔끔하고 정겹던지 읽을 때마다 이런 후배가 있었나 놀라곤 했었다. 그런데 또 놀라운 건 글쓴이 이름 뒤에 적힌 졸업 기수와 출신 동네를 보면 초등학교는 나보다 7년 늦게 졸업을 했지만 후배가 태어나고 살았던 동네는 내 고향 마을이 아닌가. 그렇지만 후배 이름을 아무리 떠올려 봐도 누군지 통 알 수가 없었다. 내 고향의 집과 내 여동생, 내 자신을 소개하는 댓글을 보내자 후배는 자신의 부친 존함과 엄마 택호를 알려주는 답장을 보내 주었다. 그러자 고향의 한 어르신 모습이 떠올랐으나 긴가민가 싶었다.
집성촌인 내 고향 마을에 사셨던 후배의 아버지는 나와 항렬이 같았으니 후배는 질녀뻘 되는 족친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1년 선배인 내 막내동생도 알고 있었다.
내가 내 고향집을 알려주었을 땐 자신은 윗동네에 살면서 6년 동안 내 고향집 앞을 지나다니며 초등학교에 다녔다며, 우리 집 마당에 있었던 석류나무를 기억하면서 석류나무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2006년부터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하면서 '정토회'의 희망리포트를 쓴다는 후배는 2010년에 등단도 했다더니, 지난 가을에 '인천문화재단'로부터 2016년도 창작지원금 수혜자로 선정되어 그 창작지원금으로 첫 작품을 냈다며 한 권을 보내왔다.
"석류나무 꽃으로 기억되는 이석도 아제에게…"란 예쁜 글귀까지 넣어서.
「꽃이 올라가는 길」은 후배의 여유롭고 행복한 삶을 담은 책이다.
교편생활을 하는 남편과 함께 강화도에 살면서 수시로 걷는 나들길에서 만난 강화도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썼지만, 간간히 강화의 역사를 들려주기도 한다. 또 강 하나 건너 북녘땅을 바라보며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기도 했는데 글이 참 깔끔하고 아름답다. 나도 글공부를 하고 있고, 수필로 등단까지 했지만 넘볼수 없는 수준의 글솜씨다.
집사람도 틈틈이 읽더니, 이 산문집은 다른 어떤 책보다 읽기는 편하면서도 인간미가 넘치고 따뜻해서 감동적이란다.
그러면서 내게도 이런 글을 한번 써 보란다.
어휘력과 좋은 표현은 독서량과 비례한다던데, 독서량이 턱없이 부족한 내가 이처럼 따뜻한 글을 쓸 수 있을까?
나는 어린 날엔 좋은 책보다 만화책을 많이 읽고, 다 커서는 일이 아니면 어울려 노느라 독서를 게을리 했으니…
정토회에 열심인 집사람은 나의 이런 핑계를 듣더니 웃으며, 스님의 법문을 많이 들으면 시야가 넓어질 뿐 아니라 마음이 맑아져 가슴 따뜻한 글을 쓰는데 큰 도움이 될 거라면서 자기를 따라 정토회에 다니자고 했다.
책을 헬스장에 들고 다니며 읽다보니 한 달이나 걸렸지만, 다 읽고 나자 몇 해 전에 읽었던 유홍준 前 문화재청장이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었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그때처럼 편안함과 뿌듯함, 인간미, 잔잔한 감동이 남았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도시생활을 접고 강화도로 내려간 후배의 행복한 삶이 눈에 펼쳐지는 듯했다.
산 아래 아담하게 꾸며진 농가의 잔디마당에서는 토끼와 토종닭들이 뛰놀고 있을 테고, 햇살이 따뜻한 봄날엔 새순이 파릇파릇 돋는 뒤뜰의 두릅나무 사이 여기저기서 돋아나는 인삼 새싹이 보일 것 같았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예사로 보았을 소소한 것들도 그녀에게는 좋은 소재였다.
시간이나면 걸었던 강화둘레길에서 만나는 사람, 풍경, 자연 등 모두가 그녀에게는 좋은 글감이었다. 누구나 일상에서 겪고 느낄 수 있는 하찮은 일들도 글감이 된 것 같았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석'이란 속담이 있듯이 이런 글감들이 보통의 사람을 만났다면 무슨 소용일까 마는 후배 같은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났으니 어찌 그냥 묻히리오?
강화도에서의 일상이 이렇게 빛나는 보석처럼 엮여 있는 걸 보면 후배의 글솜씨가 예사롭지 않은 덕분도 있겠지만, 이것보다는 후배의 인정 많고 따뜻한 삶이 글에 녹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남매를 두고, 교직에 있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다하면서도 지역에서 방과후 교실을 열어 이웃 아이들을 돌보고, 또 우리말과 우리글에 어려움을 많이 겪는 외국인들에게 우리글과 우리말을 가르치는 봉사활동도 하고 있단다.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어학당까지 다니며 공부를 했다니 이 얼마나 따뜻하고 여유로운 삶인가. 후배가 존경스럽다.
'글은 그 사람의 인품을 보여준다.' 말이 있다.
이 말이 맞다면, 후배는 틀림없이 매사에 감사해 하고, 모두에게 겸손하며, 언제나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리라.
후배는 두번 째의 산문집엔 무슨 이야기들을 담을까?
고향이야기를 담길 은근히 기대하게 된다.
내 딸들도 이 후배의 나이쯤일 때는 자연을 벗 삼아 그림을 그리고, 글도 쓰면서
겸손하고 배려하는 삶, 따뜻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으면 좋겠다.
나도 후배처럼 읽으면 가슴이 따뜻해지는 글을 쓰고 싶다.
고향 후배의 산문집
참 멋진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