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고엽제 전우들의 분노
고엽제 전우들의 분노
이 석 도
한가위를 몇 일 앞둔 대로변 곳곳에는 고향에 잘 다녀오라는 현수막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그런데 서초동에 있는 고등법원 정문 앞 도로 양쪽에는 [대한민국 고엽제 전우회]란 표지판을 붙인 차들이 수십 대나 줄지어 서있었다. 마치 수도권에서 총출동이라도 한 것처럼.
길가에 세운 스피커에서는 옛 군가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인도를 가득 메운 얼룩무늬 군복의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있었다. 앞에 선 사람의 구령에 따라 절도 있는 모습으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애국가를 4절까지 불렀다. 그러고는 선창에 따라 목청껏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모두가 하나같이 군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의 모자 밑으로 삐져나온 긴 머리칼은 하얗게 세어 있었다.
고엽제 전우회의 회원이라면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미군들이 밀림을 고사시키기 위해 살포한 제초제에 피해를 입은 군인들이 아니겠는가.
월남으로 떠나는 국군들을 환송하는 행사에 가곤 했던 1970년대 초가 떠올랐다. 고교생이었던 우리들은 큰 군함이 정박해 있는 부산항의 부두에 모여 참전 용사의 무사 귀환을 염원하며 군가를 따라 불렀다. 전쟁터로 가는 자식에게 무엇이든 한 가지라도 더 전해주고 싶어 하는 부모들이 편지와 물품을 담은 바구니를 기다란 끈에 묶고, 그 끈의 다른 한 쪽엔 사과를 매달아 던질 때 대신 던져주기도 했었다. 환송 행사가 끝나면 떠나는 군함의 갑판을 빼곡히 채운 군인 아저씨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노래를 불렀는데, 뱃머리를 돌리며 불어대는 뱃고동 소리는 어찌 그리 구슬프게 들리던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월남 전쟁은 1975년도에 끝이 나고, 그때 고등학생이었던 나의 나이도 육십을 넘겼다. 그러니 고엽제 전우들이라면 아무리 젊어봐야 60대 중반을 훌쩍 넘겼을 터.
공산군과 싸우는 이국의 전쟁터에서 목숨을 바쳐 조국을 보호하려 했던 그들.
보릿고개가 여전했던 시절, 한강의 기적에 초석을 깔았던 그들이다.
그랬던 그들이 지금은 왜 거리로 뛰쳐나왔을까?
왜, 그들이 피켓을 들고 목청을 높이고 있을까?
누가 그들을 이토록 분노케 했을까?
그들이 들고 있는 피켓의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천안함 사건이나 세월호 사건 같은 국가적인 재난에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거나 북한을 옹호하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사람을 1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했으나, 2심에서는 선고유예 판결로 풀어주었다며 이를 규탄하고 있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자 했던 조국이 혹시라도 공산화가 될까봐 다시 나선 것 같았다.
인터넷에 떠도는 어떤 글들을 보면, 내가 느끼기에도 남남갈등은 예사롭지 않다. 말도 안 되는 글을 쓰는 이들에겐 사실 여부는 필요치 않은 것 같다. 서로 상대방을 우파니 좌파니 하면서 비방하는 그들에겐 상대방은 언제나 악(惡)이고, 자신만이 선(善)이다. 이렇게 갈등을 부추기고, 국론을 분열시키려는 자들이 활개를 치는 나라가 된 것 같아 내가 다 걱정인데, 몸소 총을 들고 공산군과 싸웠던 고엽제 전우들이야 오죽하랴.
하지만 이념의 갈등도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다. 그러나 상처는 곪아서 터져야 빨리 낫는 법. 고엽제 전우들이 목청껏 토하는 분노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념갈등이라는 곪은 상처를 터뜨리는 가시가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꼬.
이번 추석에는 그들도 분노의 함성 대신 손주들의 재롱을 보면서 태평성대를 노래할 수 있으면 좋겠다. 목숨까지 내놓았던 그들이 안심하고 여생을 즐길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2015. 9.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