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방

[수필] 육손사업

자갈 길. 2016. 1. 8. 22:51

 

육손(育孫)사업

 

이 석 도

 

   “육손사업을 하시는구나”

   오랜만에 만난 선배가 근황을 묻기에, 맞벌이 하는 딸네의 아기를 돌보고 있다고 했더니 한 말이다.

 

   딸은 출산휴직이 끝날 무렵부터 아기를 어린이집에 보냈다. 그런데 몇 일만에 아기가 기침을 하더니 앓기 시작했다. 금방 나을 줄 알았던 아기는 입원치료를 받고서야 나았다. 응급실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끙끙 앓는 모습이 얼마나 애처롭던지….

   두 돌이 될 때까지는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기로 했다. 그 뒤로는 새벽마다 집사람은 운동을 마치자마자 딸의 집으로 가서, 출근하는 딸 부부 대신 자고 있는 손자의 곁을 지킨다. 그러면 나도 운동을 마치고는 딸네로 가서 아기를 우리 집으로 데려온다. 딸이 퇴근해 함께 저녁을 먹고 목욕을 시킨 후 데려갈 때까지 밥을 먹이고, 낮잠을 재우고, 함께 놀아주는 게 우리 부부의 하루 일과가 되었다.

   어미로부터 먹이를 받아먹는 제비 새끼처럼 쫙쫙 입을 벌려 밥을 받아먹는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잠투정을 좀 부리다가도 금방 잠들어 쌔근거리는 모습은 또 얼마나 예쁜지…. 귀엽게 잠자는 모습을 보면서 아기의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있으면 천사가 따로 없다 싶다. 모든 시름과 피로가 싹 사라진다.

   지금까지는 육아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젊은이들의 하소연이 들리면, ‘흥, 옛날 엄마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십 남매도 잘 키웠는데…’, ‘집사람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쌍둥이를 키웠는데…’ 하며 엄살로만 치부했었다.

   손자를 돌보는 대부분의 할머니들은 팔다리 허리 등 어디 성한 곳이 없다는 뉴스가 있었을 때는, ‘설마’ 했다. 설령 그렇다 해도, 평소 건강관리를 열심히 하는 내게는 일도 아니려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겨우 아장아장 걷는 손자가 넘어질세라 어디 부딪칠세라, 종일 따라다니며 보살피자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집사람과 둘이서 손자 한 명을 돌보는데도 이렇게 힘이 들 줄이야.

 

   손자가 돌아간 뒤, 온 집안에 흩어진 장난감과 책들을 정리하고 청소까지 끝내고 나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내 몸은 야밤에 색소폰 연습을 하기로 한 다짐을 내려놓게 만들곤 한다.

   그렇지만 쌔근쌔근 잠든 손자의 귀여운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최근 연일 매스컴을 달구고 있는 어린이집 아동학대 뉴스가 떠오른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아이들을, 그것도 혼자서 여러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보육교사들이 얼마나 힘들까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어리고 사랑스러운 아기들을 어떻게…’, ‘손자를 어린이집에 안 보내기를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곤 한다.

   우리가 돌본 뒤로는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고 잘 자라는 손자의 모습에서, 아기를 맡기고 출근하는 딸 부부의 밝은 표정에서 우리 부부는 피로를 잊고 보람을 느낀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가 제일 곱다고 한다.’는 속담도 있다. 그런데 내 손주를 내가 돌보는 일을 ‘육손(育孫)사업’이라 거창하게 칭하니 듣기에 민망하다.

   내가 손주를 맘껏 사랑하면서 돌보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받았던 가족들의 사랑에 조금씩 보답하는 방식이자, 위로부터 받았던 사랑을 아래로 내려보내는 내리사랑의 실천일 뿐인데…. (2015. 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