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뚜기
대구에 사는 여동생이 단체카톡방에 사진 한 장을 올렸다.
메뚜기가 수북한 사진이었다.
일요일에 친구들과 고향에서 잡았다며, 볶아서 내게 좀 보내겠단다.
메뚜기.
참, 반가운 놈이다.
어릴 때 매뚜기를 잡았던 때가 떠올랐다.
늦가을, 낫질을 기다리며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는 황금빛 벼 이삭 사이랑
농부들이 베어 논바닥에 가지런히 말려놓은 볏가리 위는 온통 메뚜기 천지였다.
우리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책보를 마루에 집어던지고는 주둥이에
대나무대롱을 넣어 묶은 큼직한 헝겊 주머니만 챙겨들고 들판으로 내빼곤 했다.
나락 사이로 폴짝폴짝 날뛰는 메뚜기를 잡다보면 금방 이마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온 들판을 헤매며 메뚜기를 잡아 대롱 속으로 쏙쏙 집어넣었다.
주머니 속에 갇힌 메뚜기는 빠져나오려고 날뛰지만,
작은 구멍의 대롱을 빠져나올 순 없었다.
메뚜기로 가득채운 주머니를 들고 집에 가면
어머니가 반찬으로 만들기 위해 달달 볶고 있으면 우리는 옆에서 집어먹곤 했다.
통채로 바삭바삭 씹어 먹을 때의 그 고소함, 그런데 지금은 아련하다.
언제부턴가 그 많던 메뚜기가 종적을 감추었다.
한동안은 고향의 들판에서는 단 한 마리도 볼 수가 없었다.
내가 메뚜기를 볼 수 있었던 곳은 오히려 서울의 술집이었지만,
그곳의 안주로 나온 메뚜기마저 북한산이 아니면 중국산이었으니….
그런데 몇 해 전부터 메뚜기가 간혹 보이기 시작했다.
한동안 많이 살포했던 강한 독성의 농약과 화학비료로 많은 폐해를 겪었던 농민들이
유기농 또는 친환경 해충제와 비료로 농사를 짓기 시작한 덕분이란다.
동생이 이렇게 많이 잡은 걸 보면, 내 고향은 다시 메뚜기 천국이 된 모양이다.
나는 메뚜기에 대한 매우 특별한 추억이 있다.
메뚜기를 잡으려다 우물에 빠진 사고다.
내가 대여섯 살 때였다.
우리 집을 비롯해서 아랫 동네 대부분의 집이 물을 길어 먹는 우물이었는데
우물 바로 옆에 어른 두 사람이 팔을 벌려 잡아도 손이 닿지않을 만큼의 거목인
회화나무가 있어 해나무 새매(우물)라고 불렀던 물맛이 좋은 우물이었다.
여름이면 하얀 회화나무꽃이 떨어져 온 우물가는 마치 눈이라도 내린 듯이 보이고,
두레박질에 담겨 오는 물에는 하얀 회화나무꽃이 둥둥 떠있었다.
아주 오래 되었다는 그 우물은 가뭄이 아무리 심해도 마르지 않았는데,
어른들은 가물 때면 회화나무 뿌리가 머금고 있던 물을 내뿜기 때문이라고 했다.
새벽마다 물동이를 이고 온 아낙네들로 붐비었던 그 우물은 꽤 깊었다.
두레박의 끈 길이가 족히 어른 키의 두배는 되었던 것 같다.
어느 날, 나는 두 살 위의 누나와 여동생이랑 그 우물가에서 놀고 있었는데,
폴짝폴짝 뛰는 영장 메뚜기(연두색을 가진 벼논의 메뚜기와 달리 갈색의 거무티티한 메뚜기로
먹을 수 없다고 해서 내 고향에서는 영장 메뚜기라 불렀음)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담벼락에 앉아 있던 그놈은 내가 잡으려 하자 폴짝 날아 우물 옆의 땅바닥에 내려앉았다.
다시 다가가면 우물의 우리(돌 또는 시멘트로 만든 울타리) 위로 날아가고,
또 조심조심 우물우리로 다가가자 이번에는 우물 안의 돌로 쌓은 벽에 가 앉았다.
메뚜기를 잡으려고 제법 높은 우물우리에 올라가 고개를 내밀다가
나는 우물 안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동생이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본 누나는 엉엉 울면서 50여 미터쯤 떨어진 작은집으로
달려가고…, 마침 작은 집에는 작은아버지께서 돼지우리서 두엄을 걷고 계셨다.
나는 쇠스랑을 집어든지고 달려오신 작은아버지의 목에 매달려 올라왔지만
이미 떨어지면서 우물 안의 돌담에 부딪친 내 이마에서는 피가 철철 흘렀다.
어른들은 다음 날 벌겋게 물든 우물물을 모두 퍼내야 했다.
그때 입은 상처는 아직 내 이마에 희미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집집마다 상수도가 들어오고 나서는 그 우물은 메워지고 말았단다.
50여 년이 흘러 더 거목이 된 회화나무는 아직도 여름이면 하얀 꽃을 피우고 있는데.
사진 한 장에 고향이 그립고, 어린 시절이 생각나다니…,
메뚜기를 잡으며 컸던 때가 바로 어저께 같은데, 벌써 육십이 넘었다니….
사람들은 추억 속에 늙어간다는 말이 틀리지 않은가 보다.
50년의 세월.
요즘 매뚜기는 어떤 맛일까?
동생이 보내 올 메뚜기가 기다려진다.